
"내가 그렇게 독했어요? 호호 "
연기자 이혜숙이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드라마와는 너무도 다른 표정이다.
MBC 인기 주말극 '천하일색 박정금'(극본 하청옥·연출 이형선)의 이혜숙은 웃고 있어도 예쁘게 볼래야 볼 수가 없다. 그녀가 맡은 사여사, 사순자는 근래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악역이다.
사여사는 가정부로 주인공 박정금(배종옥 분)의 집의 집에 들어와 본부인을 내치고 안방 마님 자리를 꿰찬 집념의 여자다. 잃어버린 정금이의 아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지 알면서도 십수년을 숨긴 독한 여자고, 그 와중에도 모든 일을 잡아떼면서 한 몫 챙길 궁리만 하는 악녀다.
"대사가 그악스러웠지요. 나도 연기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더라구요. 욕심이 과하면 사람이 그렇게 되는구나 했지. 이게 바로 악의 끝인가 싶더라고요. 하지만 그냥 주어진 대로 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남다르다. 지독한 악녀 연기에 치를 떨면서도 그 사순자가 밉고 사순자에 시달리는 정금이가 안쓰러워서 사람들은 TV를 틀었고 채널을 고정시켰다.
"감독님한테 그랬어요. 나를 어디까지 몰려고 이렇게 사악하게 만드느냐.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만의 세계가 있어요. 지금까지 26년 가까이 연기를 했지만 저는 작가가 써주는 대로 그대로 하는 걸 좋아해요. 애드리브를 하면 작가의 세계가 나타나지 않잖아요."
이혜숙의 악녀 연기가 최고라는 찬사도 잇따른다. 배종옥과 맞붙어 쌍코피가 터졌던 최근 방송분이 더더욱 그랬다. 완벽한 몰입을 위해 대사만 3일을 외운 뒤 연기를 했다. 찍고 나선 한참을 끙끙 앓았다.
"내가 인터넷을 못해. 많이들 좋아해 주셨다고 얘기만 들었어요. 열심히 한 게 헛되지 않않구나 하는 생각이랄까. 그걸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시청자들은 늘 정확하시거든요. 제일 무서운 게 시청자예요."
이제 다음회면 천하의 악녀 사여사도 '천하일색 박정금'에서 죽음으로 하차한다. 지금까지 지은 죄에 용서를 구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혜숙은 아쉽지만 예상했던 결과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쉽죠. 모두가 아쉬워해요. 죽음으로밖에 갈 수가 없었을 거에요. 죽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마지막 녹화를 앞두고 제가 정금이에게 딸 유라를 부탁해요. 정금이가 제 커피를 타준다고 돌아서는데, 그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찡하더라구요."
이혜숙은 1978년 미스 해태에 입상하면서 처음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본격적인 연기에 들어간 것은 MBC 10기 공채 탤런트에 뽑혀 드라마 '장희빈'에 출연하면서부터. 연예계 데뷔가 10년이지만 우리가 이혜숙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MBC '천하일색 박정금'에 출연하면서 KBS 1TV '너는 내 운명'을 함께 찍고 있고 SBS 새 드라마 '유리의 성' 출연을 결정지을 만큼 바삐 연기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혜숙은 스스로를 드러내길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한다.
"철두철미한 게 아니죠. 연기자로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에게 보여줘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너무 많은 것을 보여드리면 시청자들께서 제 연기에 빠지지 않고 이혜숙 개인을 보게 되니까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기에 대한 것 뿐. 이혜숙은 고두심, 박근형 같은 선배 연기자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감추지 않으며 "그만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연기자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처음엔 잘 몰랐지만 하다보니 연기가 내 천직이라는 걸 뒤늦게 알겠더라구요. 이 나이에 연기자 이혜숙으로 계속 일하는 것이 바로 저의 끊임없는 숙제지요. 연기에 정답은 없으니까. 그냥 진실되게 해야 하니까."
이혜숙은 많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저 "무조건 100번 대사를 외우라는 것 뿐"이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노력과 성실을 강조하는 그녀이기에 천하의 악녀도 열심히 연기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노력하면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는다"며 "다시 태어나도 연기를 하고 싶다"고 고백하던 고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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