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에만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륜, 치정, 살인, 범죄, 사랑과 같이 시기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소재들 외에 올해 극장가에는 좀비와 간첩, 잉여가 다수의 작품에 차용되며 새로운 소재로 각광받았다.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좀비물이 로맨스와 스케일, 코미디를 만났다. 미국드라마 '워킹데드'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데 이어 올해는 대중이 즐길 수 있는 '하이브리드 좀비물'이 영화계에도 대거 등장해 흥행까지 성공했다.
지난 3월 개봉한 '웜 바디스'는 좀비가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는 독특한 설정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조지 로메오의 '시체' 3부작부터 정통 좀비물의 계보를 줄줄 꿰고 있는 좀비 마니아들은 '좀비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여성 관객들은 잘생긴 좀비 R(니콜라스 홀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 '월드워Z'는 좀비물에 엄청난 스케일을 더했다. 음산한 도시에서 좀비를 피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넘어 좀비 바이러스의 원인을 찾기 위해 미국, 이스라엘, 한국, 유럽을 넘나드는 여정을 그렸다.
'월드워Z'는 비칠비칠 무기력하게 걷는 좀비의 특성을 깨고 엄청난 속도를 가진 '진격의 좀비'를 출연시켰다. 엄청난 속도와 파워를 지닌 좀비들은 이스라엘의 성벽을 기어오르며 엄청난 좀비 언덕을 만들기도 하고, 골목을 가득 메우고 파도처럼 밀려들기도 하는 등 보는 맛을 더했다.
소소한 저예산 영화에서도 좀비 코드는 속속 등장했다. 권현상과 박희본이 출연한 '렛 미 아웃'은 짝사랑하던 여자를 위해 좀비영화를 기획하는 영화 학도의 이야기를 그렸고, '사랑해 진영아'의 주인공 진영(김규리 분)은 좀비영화 시나리오만을 고집해 번번이 영화사에서 면박을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분단국가라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만 나올 수 있는 소재인 남파공작원을 다룬 영화도 올해 네 편이나 된다. 꽃미남 간첩, 가족으로 위장한 공작원 무리, 동생을 위해 공장원이 된 남자, 조국에 버림받은 공작원까지 소재를 같지만 이야기는 다양했다.
꽃미남 남파간첩 3인방의 이야기를 그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 원작답게 만화적인 에피소드들과 원작에 부합하는 캐스팅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김수현과 박기웅, 이현우는 아이돌 못지않은 소녀팬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였고, 영화는 승승장구해 695만 명을 동원했다.
여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남파 공작원이 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동창생'도 오랜 기다림 끝에 개봉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위장한 남파 공작원 리명훈으로 분한 최승현은 홀로 영화를 이끌며 감정연기와 액션까지 소화하는 등 배우로서 가능성을 입증했다.
'붉은 가족'은 앞선 두 편의 영화와 차별점이 확실했다. 단란한 가족으로 위장해 다른 이들에게는 부러움을 얻지만 정작 자신들의 가족을 지킬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작전을 수행하는 중 서로에게 진심으로 정을 느끼게 되고 진짜 가족이 된다. 10개관을 밑도는 상영관에서 소규모로 개봉해 많은 관객을 만나지는 못한 점은 다소 아쉽다.
올해 독립영화계에서 '잉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잉여인간'을 뜻하는 잉여들의 일상은 때로는 처절한 눈물을, 때로는 유쾌한 웃음을 유발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힘내세요 병헌씨'는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춘 이병헌(홍완표 분)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푸념 가득한 술자리는 기본이요, 늦잠은 생활인 '잉여로운' 영화감독 이병헌이 메이저 영화사에서 로맨틱코미디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힘내세요 병헌씨'는 재기발랄한 시도와 홍완표의 맛깔스러운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제목부터 잉여를 전면에 내세웠다. '잉투기'는 꿈은 크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이 시대의 잉여들을 생생하고 유쾌하게 담았다. 인터넷 커뮤니티, 먹방 등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것들을 이용한 '잉투기'는 가벼운 소재를 통해 결코 가볍지 않은 젊음을 그렸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출발부터 재기발랄하다. 민박집 홍보영상을 찍어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은 방법으로 1년간 유럽여행을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떠난 4인방은 갖은 고생 끝에 호스텔 홍보영상계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그들의 최종 목표인 영국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우여곡절을 흔들리는 카메라와 비속어가 난무하는 살아있는 대화들로 채웠다. 물론 가장 많이 보이는 화면은 누워있는 장면이다.
안이슬 기자 druken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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