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근하고 사랑스러운 아줌마.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 캐릭터들은 배우 라미란(41)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녀는 탈북 여성의 고달픈 삶을 그려 진짜 탈북자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고, 절제된 연기로 보는 이의 눈물을 쏙 뽑아놓기도 했다. 캐릭터가 아닌 그냥 '라미란'으로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이 모자라 영화, 드라마, 시트콤, 예능을 가리지 않으며 보여준 라미란. 그녀의 결정적 순간들을 꼽아봤다.
◆'친절한 금자씨', '박쥐..그녀는 박찬욱 사단?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친절한 금자씨'(2005)는 라미란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출소한 금자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감방 동기가 바로 그녀. "그 XX는 죽였어?"라고 묻던 그녀의 서늘한 홑꺼풀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프로듀서가 된 당시 한 스태프는 "처음 뵙는 얼굴이었지만 카리스마가 선명했다"고 그녀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후 '금자씨' 스크립터 출신인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에 출연했으며, '박쥐'에도 송강호에게 피를 뽑아주는 간호사로 출연한 라미란의 행보는 사실 '박찬욱 사단'이라 불러 모자람이 없다.
"보이는 대로 봐주시더라고요. TV 보던 분도, 영화 보던 분도 처음 보는 여자가 나왔으니까요. 웃기지 않아도 되고, 가만히 있어도 되고. 편했어요. '박쥐'는 '미쓰 홍당무' 고사 때 박찬욱 감독님을 뵙고는 '왜 안 부르시냐, 저 지금 놀고 있다'고 옆구리를 찔렀어요. 감사하게도 송강호씨에게 피를 뽑아주는 간호사 역할로 저를 써 주셨어요. 몸집이 있는 배우가 필요하셨거든요. '박찬욱 사단'요? 감독님이 절 버리신 것 같아요.(웃음) 아무래도 초반과는 이미지가 달라졌고, 많이 소진되기도 했고요. 감독님이 코미디를 하지 않는 이상 저를 부르시려나요. 저는 언제라도 갈 의향이 있어요.(웃음)"
◆'댄스타운'..문제의 파격 노출? 그녀의 다른 얼굴을 보시길
이후 라미란은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입지를 굳혀갔다.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도드라진 작품이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2010)이다. 과거 토크쇼에 출연한 라미란이 "길바닥에서 공사(!) 없이 베드신을 찍었다"고 밝혀 유명세(?)를 탔지만 노출이 핵심인 작품은 아니다. 탈북 여성의 힘겨운 정착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라미란은 주인공 리정림 역을 맡았다. 유쾌한 아줌마 라미란에 익숙해진 관객이라면, 남편과 헤어져 낯선 회색 도시에 남겨진 '댄스타운' 속 여인이 충격적이고 낯설지 모른다. 대사도 몇 줄 없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터벅터벅 길을 걷던 그녀를 보며 '진짜 탈북자를 캐스팅했나보다' 지레짐작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심지어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라미란에게 탈북자냐고 물어본 관객도 있었다.(!) 그 열연에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여자배우상이 라미란에게 돌아갔다.
"주연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지닌 힘이 있죠. 아줌마로만 주로 나오던 저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해요. 전규환 감독님이 저의 다른 모습을 봐주신 게 아닐까 하고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원하셨거든요. 그래서 공사(!)를 안 하시겠다고…. 늘 하신 이야기가 '연기자처럼 연기하지 말아줘'였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쉽진 않았어요. 슛이 들어가면 습관적으로 연기를 위한 호흡이 들어가니까요. 연기하며 연기를 안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우면서 편안했던 작품이에요. 배우로서도 환기가 됐어요."
◆'댄싱퀸'부터 '히말라야'까지..그녀는 윤제균 사단?
2012년 '댄싱퀸'은 라미란이란 배우를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엄정화에 안 뒤지는 왕년의 댄싱머신이 될 수 있었던 건 수년을 뮤지컬 배우로 살아온 이력 덕. 이후 윤제균 감독이 이끄는 JK필름에서 만든 '스파이', '국제시장', '히말라야'에 연이어 출연하며 라미란은 유쾌하고도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를 확립해갔다. 특히 '스파이'의 요구르트 아줌마는 대한민국 첩보요원계에 한 획을 그은 폭소유발자. '국제시장'에선 '꽃분이' 고모님으로 존재감을 남겼고, '히말라야'에선 든든한 여성 산악대원으로 든든히 원정대를 지켰다.
"정화 언니랑 케미가 정말 좋았죠? '미쓰 와이프'에 드라마까지 3개 작품을 같이 했어요. 제가 언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아직도 많아요. 그렇게 해명을 하는데도 잘 안되네요. 언니가 더 늙어야 비슷해진다면야…. '스파이'는 우여곡절 많은 작품이잖아요. 대타로 들어갔는데 이걸 재밌게 할 방법을 모르겠는거예요. 찍을 땐 정말 웃기지 않았어요. 안 믿긴다고요? 진짜예요. 다 찍고 나서도 죄송하다고 했어요. '국제시장'이요? 제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기사로 보고 알았어요. 그런데 정작 캐스팅도 안 하고 대본도 안 주시는 거예요. 감독님한테 '왜 안 주세요' 했더니 '미란아, 니가 할 게 없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다 하게 된 게 덕수 고모 역할이죠. '이거라도 해라' 하고 주셨는데 분량이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꽃분이네' 그 꽃분이가 덕수 고모예요."
◆'소원', 눈물 쏙 뺀 열연, 정작 본인은 눈물이 안 났다?
라미란 하면 일단 웃음보가 터지던 그 때, 아동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이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소원'은 좀 결이 다른 작품이었다. 이웃집 영식 엄마로 등장한 라미란은 참고참던 눈물을 결국 터뜨려 놓는 영화의 히든카드였다. 라미란은 이 작품으로 2013년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탔다. "세상에 있는 '소원'이들에게 '너희 잘못이 아니야. 힘내'"라는 수상소감으로 식장을 울컥하게 만든 그녀. '스파이'에서 본 라미란을 자신이 '소원'에 추천했다며, 배우 설경구가 얼마나 두고두고 뿌듯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아픈 얘기지만 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판타지 같은 영화죠. 영석 엄마도 판타지 속 나비 같고요. 제가 제 영화에 정말 짜거든요. '소원'은 정말 1000만 갈 줄 알았어요. 꼭 1000만 관객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병원신 찍으며 안 돼서 힘들어 했던 생각이 나요. 이준익 감독님이 '괜찮아, 자기가 뭐 안해도 돼'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뭔가 보여주려 했구나' 하고 부끄러웠죠. 수박 겉핥기 같은 연기를 한 1번 테이크가 결국 영화에 쓰였어요. 그런데 그 장면이 그 곳에 쓰이니까 보는 사람의 감정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감독님이 옳았죠. 많이 배운 순간이었어요."
◆TV 속 라미란..'진짜사나이' 스카웃 제의는 진심?
그녀는 TV에서도 종횡무진했다. 리얼예능 '진짜사나이'는 씩씩한 맏언리 라미란을 다시 보게 해 준 작품이다. 군 관계자들로부터 '군에 남으라'는 러브콜을 받았을 정도다. 어디 이뿐이랴. 현재 방송 중인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도 왕언니 갓미란을 발견할 수 있다. 진상 상사 라과장님으로 출연한 시트콤 '막돼먹은 영애씨', 사랑스러운 치타여사로 출연한 '응답하라 1998'은 또 어떤가. 류준열이 툭툭 던지는 "우리 엄마 라미란이야~"라는 대사가 어쩌면 그렇게 쏙쏙 박히던지. 맞아, 라미란이야. 믿고 봐도 괜찮아.
"'진짜 사나이'에서 잘 하는 모습만 보여주셔서 그렇지, 체력이 안돼서 정말 힘들었어요. 유격장 오를 때 애들이 엉덩이 밀어 주고 혜리가 허리 잡고 야단이었죠. 제작진도 나이든 구멍 언니로 구색을 맞췄을 텐데 사격을 잘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에이스가 됐죠. 군 관계자들은 제 패기와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남으라던 얘기, 진심인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왜 마음에 없는 소릴 하셨겠어요. 계속 군에 계실 분인데…. '언니들의 슬램덩크'를 굳이 여자예능이라 나누고 싶진 않아요. 다만 여자들이 모였으니 나름 재미가 있겠구나 했죠. 저희끼린 '오버하지 말자, 있는대로 하자' 그렇게 하고 있어요. 연연하지 않으니 편안해요. 그러니 무리수도 없고요. 다음엔 뭘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요.
'영애씨'는 동아줄 같은 작품이에요. 꾸준히 인지도를 높여줬죠. 진상이라고 욕도 먹었지만 좋아해 주시는 분도 있고. 저, 그렇게 진상떠는 사람은 아닙니다. '응팔'은 사실 다 알아서들 해주신 거죠. 거기 출연자들이 많잖아요. 우리끼린 '마당 쓸고 돈 번다'고 농담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장면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사람 한 마디에 힘이 실리더라고요."
◆그리고 '덕혜옹주'
라미란은 다음달 개봉하는 신작 '덕혜옹주'에 출연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공주 덕혜의 친구이자 시녀인 복순 역이다. 라미란이 했다니 일단 웃기겠구나, 100억대 대작에 으레 있는 감초려니 지레짐작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허진호 감독은 라미란이 우리 히든카드라며 자신만만해 했다. 본인 칭찬에 유난히 인색한 라미란은 '그 또한 낚시질일 수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서 이거 참. 저 진짜 조금 나와요. '응팔' 촬영하고 좀비 상태로 다크서클도 장난 아니었구요. 이전과 다른 라미란이요? 보시는 분들이 평가해주실 일이죠. 그저 많은 분들이 보시고 공감해 주셨으면 할 뿐이에요."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