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경력 20년의 배우 최귀화(38). 연극무대를 바탕으로 단단하게 다진 실력파 배우를 처음 만난 드라마 '미생' 이후 2년, 그는 어느덧 스크린 다작배우로 자리잡았다. 그를 발견한 다섯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한 감독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원석 PD와 '미생'
tvN 드라마 '미생'은 배우 최귀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소심한 성격 탓에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고, 거래처에서도 무시받는 만년 대리 박대리 역할을 맡아 사실상 한 회를 주인공으로 이끌었다. 주눅 든 기색이 역력한 직장인의 얼굴에 시청자들은 그만 푹 녹아들었다. 배우 최귀화의 발견이다.
"드라마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지만 별 반응이 없었거든요. 드라마의 파급효과를 몰랐던 거죠.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이 됐지만 사실 별 기대가 없었어요. 됐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하고 있었죠. '곡성'을 찍던 와중에 '미생'의 첫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나요. '미생'을 찍으러 가야 하는데 저 때문에 스케줄이 꼬여 야단이 났었죠. 혼자 숙소에 틀어박혀 울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나홍진 감독처럼 김원석 감독도 철두철미하고 디테일하세요. 와일드하냐 디테일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나홍진 감독과 '곡성'
'미생' 이후로도 2년 가까이가 지나 지난 5월 개봉했지만, 순서로 따지자면 캐스팅은 '미생'보다 '곡성'이 먼저였다. 그는 극중 곽도원이 맡은 종구의 친구로 등장했다. 정육점 주인이란 설정을 살리려 직접 발골 작업을 배웠을 만큼 최귀화의 열의도 대단했다. 배우를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힘들어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최귀화는 "너무 좋아하는 나홍진 감독님 작품을 하고 있어서 삶이 위로가 됐던" 작품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꼼꼼하기로 정평난 나홍진 감독과의 작업은 물론 캐스팅 과정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먼저 비디오 테스트를 하고 나홍진 감독님 미팅을 2번 했어요. 너무 좋아하는 감독님의 작품이라 꼭 출연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첫 미팅에서 엄청나게 깨졌어요. 아주 밑바닥까지 작아져서 집에 돌아갔죠. 떨어진 건 둘째 치고 너무 속이 상하더라고요. 낮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혼자 술을 먹었어요. 그런데 당시 도와주던 매니저한테서 '한 번 더 보자고 한다'며 전화가 왔어요. '못하겠다' 해 놓고는 술이 깨서 다시 갔죠. 준비도 잘 안 했죠. 그랬더니 감독님이 잘 한다고 '그거야' 그러시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캐스팅이 정해지고 역할도 받았어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홍진 감독을 번쩍 안아 두 번을 돌렸어요. 아마 놀라셨겠죠?"
◆박대민 감독과 '봉이 김선달'
200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코미디 '봉이 김선달'의 최귀화는 사기패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금사빠' 정판석 역을 맡아 웃음을 준다. 많은 관객들이 '봉이 김선달'에서 가장 웃긴 장면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았던 대목이 바로 그의 출연분. 특히 여장 유승호에게 한 눈에 반해 사투리로 감탄사를 연발하는 대목에선 최귀화의 능청스러운 코미디 내공을 실감할 수 있다. 현장에서부터 빵빵 터트린 최귀화의 활약에 초반 한 번만 등장할 예정이었던 분량이 2배로 늘어 막바지 카메오까지 꿰찼다. 최귀화는 박대민 감독에 대해 "현장에서 배우가 가진 에너지를 잘 캐치하시는 것 같다"며 "뭔가 할까 망설이던 순간을 포착해 기회와 자신감을 주신다"고 말했다.
"늘 심각해 보였던 제가 코미디를 하니 의외라는 분이 있으시더라고요. 아직 도 대학로에서 무대에 오르는 유명한 코미디 연극이 있어요. '룸넘버 13'이라고, 제가 초연 멤버에 주연이었어요. 제 생각에는 웃길 줄 몰랐던 배우가 하는 코미디의 의외성이 웃겼던 것 같아요."
◆연상호 감독과 '부산행'
1000만 축포를 쏘아올린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에선 이름없는 노숙자가 된 최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머리며 수염을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온 얼굴에 검댕을 바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노숙자는 좀비로 뒤덮인 KTX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있는 인물. 최귀화는 실제 머리, 수염은 물론 손톱까지 기르고 영화 속 분장 그대로 서울역으로 가 노숙자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는 등 공을 들였다. 그는 "딱히 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거지꼴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고 무시하는 게 느껴지더라"며 촬영 현장에서 되려 안도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비중이 조금 달라졌어요. 노숙자가 가진 메시지가 좀 더 직접적이었다면 개봉판에서는 그런 느낌을 조금 덜어냈죠. 그래도 관객들에게 어떤 페이소스를 전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연상호 감독님은 나홍진 감독과는 또 다른 스타일이죠. 촬영 속도도 빠르고 별다른 연기 디렉션 자체가 없어요. 굉장히 유쾌하고 가벼운 반면에 연결 동작 등에 대해서는 꼼꼼한 편이고요. 그런 면모가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아요."
◆김기덕 감독과 '그물'
'부산행'의 마동석과 다시 함께하는 '원더풀 라이프', 송강호 주연 장훈 감독의 '택시 운전사', 박광현 감독의 신작 '조작된 도시', 깜짝 출연한 배우 하정우 감독 김성훈의 '터널' 등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최근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을 확정한 김기덕 감독의 '그물'이 특히 돋보인다. 뜻하지 않게 남한에 표류하게 된 북한 어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최귀화는 한국 정보요원으로 출연해 류승범 등과 호흡을 맞췄다. 김기덕 감독과는 '일대일'에 이어 인연을 맺었다. 최귀화는 공교롭게도 출연작이 칸에 이어 베니스에 초청되며 국제영화제와도 남다른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베니스영화제 참석은 어렵지 않을까요. 영화제에 계속 초청되는 게 신기하긴 하면서도 와 닿지 않는 면도 있어요. '그물'에선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체제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느끼는 인물이죠. '부산행'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거예요. 김기덕 감독님은 다시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찍는 감독이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 어떤 디렉션도 하지 않으세요. 모든 의견과 제안이 허용되는 현장이랄까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즉석에서 이뤄지는 건 아니에요. 미리 모두 계획하고 약속한 상태에서 현장만이 그렇게 굉장한 속도로 진행되는 거죠.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현장입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