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씨'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흔한 2년 차 징크스도 피해갈 것 같다. 적어도 '1987'에서 김태리는 영화에 한줄기 빛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오밀조밀하고 영리한 배우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1987'에서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냈다.
27일 개봉하는 '1987'(감독 장준환)은 1987년 1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는 사람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김태리는 철없는 대학교 신입생이자 삼촌 부탁으로 박종철 열사 사건의 진상을 전달하는 연희 역을 맡았다. 그러다가 점점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아침부터 쏟아진 폭설에 약속된 인터뷰 시간보다 40분 가량 늦게 도착한 김태리는 씩씩한 목소리로 "늦어서 죄송합니다"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고, 때로는 "어~" "아~" 감탄사를 뱉으며 여러 질문에 답했다.
-'1987'에 왜 출연했나.
▶처음에는 이야기 자체에 매료됐다. 구조 자체가 독특했다. 김윤석 선배가 맡은 박처장을 가운데 두고 모든 인물이 치고 빠지는 게 흥미로웠다. 시나리오가 몰입도가 엄청나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출연하게 됐다. 극 중 연희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읽으며 연기했다.
-'아가씨'로 크게 주목받았고, '1987'이 대중에게 선보이는 사실상 두 번째 영화인데. 2년차 징크스에 부담은 없었나.
▶사실 차기작은 임순례 감독님의 '리틀 포레스트'다. '리틀 포레스트'는 홀로 이끄는 게 많아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1987'은 워낙 대단한 선배님들이 많이 출연해서 덜 부담됐다. 촬영에 막상 들어가니 후반부에 다이나믹하고 복합적인 감정들을 쏟아내야 하는 게 걱정스럽더라. 앞에서부터 잘 쌓아야지 후반에 그런 감정이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했나. 자료들을 참고했는지, 아니면 시나리오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영화 속에서 연희가 80년 광주 비디오를 보는 장면이 있지 않나. 제작진에서 그런 영상물들이 시대를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보내줘서 봤다. 제대로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책,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보고 공부했다. 그리고 촬영 고사를 지낸 뒤에 배우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한열 열사 기념관을 찾았다. 박종철 열사 묘도 찾고. 그러면서 많이 배웠다.
-'아가씨'와 달리 '1987'에서 김태리는 같이 호흡을 맞춘다기보다는 홀로 감정을 키워가는 역할인데. 상대 배우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보다는, 홀로 액션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아~!) 사실 그런 생각은 안해봤다. 그저 영화 속에서 뒷부분의 연희 감정이 많이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표현하려면 앞에 부분에서 스무살 대학생의 모습들이 더 잘 드러나야 할 것이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부분을 장준환 감독님과도 많이 나눴고. 예컨대 마이마이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 같은 장면. (주먹을 불끈 쥐면서)아니 삼촌한테 그런 거 하지 말고 일이나 잘 하라고 하는 아이가 마이마이 받고 그렇게 아이처럼 기뻐하는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학력고사 힘들게 끝내고 대학에 갓 들어간 스무살 감성이 아닐까 싶었다.
-강동원이 잘생긴 데모하는 오빠로 등장해 같이 연기했는데. 잘 생겼던가. 영화 속에서 강동원이 처음으로 얼굴을 보이는 장면에서 연희가 그를 바라보는 모습에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 같던데.
▶정말 잘 생겼다. 사실 그 장면이 영화적으로 그런 장치인 줄은 몰랐다. 난 이미 강동원 선배가 출연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깐.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 객석에서 탄성을 지르더라.
-강동원은 어땠나.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눴나.
▶그러지는 않았다. 각자 맡았던 역할의 결이 다르니깐. 저는 아무래도 가족으로 출연한 선배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곁에서 본 강동원 선배는 되게 학구파 같았다. 책을 이 만큼 쌓아놓고 공부한 느낌이더라. 감독님과 이야기하는 데 모든 영상을 다 본 것 같았고.
-둘의 멜로가 '1987' 중반을 이끄는데.
▶연희의 감정을 멜로나 로맨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갓 스무살이 된 아이가 키 크고 잘생긴 남자와 드라마틱하게 첫 만남을 가졌다. 자존심도 상하고 설레기도 하고, 딱 그런 감성이었을 것 같다. 연희는 주체성이 강한 아이다. 강인한 정신, 단단한 멘탈, 고집, 잘난 체 등등 그런 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운동화값을 대신 내 준 장면이다. 그 당시 5000원은 굉장히 큰 돈이다. 그런 돈을 그 남자가 자기를 구해줬으니 운동화 값으로 선뜻 내놓는 것이다. 빚지고는 못 사는 아이인 게다. (그 남자에)설레서 그 돈을 건네면 너무 호구잖아요.(진 주먹을 밑으로 내리며)
-빗 속에서 강동원이 우산을 들고 오는 장면은 그의 대표작인 '늑대의 유혹'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제가 그 영화를 안 봐서. 생각지도 못했네요.
-강동원과 처음 만난 시퀀스에서 백골단에게 쫓기다가 다시 달려가서 발로 차는 장면이 인상 깊던데. 신나게 연기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장면 정말 재밌죠.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다. 감독님이 이 연희란 캐릭터를 어떻게 더 드러낼까라고 고민하다가 낸 아이디어다.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그냥 한 방 날리자고 했다. 뭐, 모든 촬영은 어느 정도 재미가 있는 법이다. 사실 되게 재밌었다.
-'아가씨'도 그랬지만 메이크업을 최소한만 하고 등장하는 것 같은데.
▶(손사레를 치며)눈화장도 안하고 최소한 메이크업만 했다. '1987'에선 그래서 눈화장을 하는 장면이 달리 사용되기도 한 것이고. (자신감이 아니라)맡은 인물들이 그런 거죠.
-'1987' 구조가 독특하다보니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거의 못 봤을텐데.
▶후시녹음할 때도 내 부분만 해서 거의 못 봤다. 중간중간 너무 궁금해서 박처장 한 장면만 보여주세요, 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삼촌으로 나온 유해진 선배를 박처장 역의 김윤석 선배가 고문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봤다. (주먹을 꽉 쥐고 흔들며) 연기 너무 잘하세요. 임팩트가. (그 연기를 그대로 따라하며)김윤석 선배가 "지옥이 뭔지 알아"라고 하는데 그 인물을 변명하는 게 아니라 깊이를 주더라.
-그런 장면을 본 게 연기에 도움이 되던가. 연희 감정을 풍부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나도 잘 해야지란 각오랄지.
▶(아~, 아~)잘한다. 나도 잘하고 싶다. 그런 생각은 했다. 삼촌 고문 장면을 본 게 도움도 됐지만, 안 보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 상상을 하는 게 더 감정에 도움됐을 수도 있으니.
-촛불집회에 실제 나갔다고 했는데. '1987' 마지막 광장 장면은 지난해 촛불집회와 닿아있기도 한데.
▶내가 경험한 촛불과 연희가 경험한 광장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게 잘 정리가 안되서 죄송하긴 한데, 내가 느낀 촛불집회는 슬픔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일과 삶을 두고 뭔가 바꿔야지란 생각에 추운 광장에 모여서 힘을 내는 게, 내겐 슬프더라. 연희가 본 광장은 다르다. 난 종교가 없지만, 종교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광장에 모인 그 사람들을 구원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이 사람들이 그 힘든 연희와 가족들, 그 삶을 구원해주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장준환 감독님은 과하다고 이야기할 지 모르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순서대로 찍었나. 앞의 부분과 뒷 부분 감정 격차가 워낙 커서 쉽지 않았을텐데.
▶뒤죽박죽이긴 했지만 다행히 순서대로 찍어서 도움이 많이 됐다. 마지막 광장 장면도 중반 정도에 촬영이 예정됐는데 뒷부분으로 밀려서 찍었다. 유해진 선배님은 아예 역순으로 찍었다. 고문 장면부터 찍었으니깐.
-실제 김태리는 '1987' 앞에 부분 연희와 더 닮았나, 아니면 뒷 부분의 연희와 더 닮았나.
▶(손가락을 오므리며)좀~, 좀~,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촛불집회를 나가기 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더 공부해야죠. 하, 공부는 어렵지만.
-'아가씨' 박찬욱 감독과 '1987' 장준환 감독은 어떻게 다르던가.
▶박찬욱 감독님은 사전에 완벽하게 준비를 하게 한다. 제작기간이 길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콘티 그대로 찍는다. 대사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안 좋아한다. 촬영 전에 마지막으로 리허설을 하고 그대로 찍는다.
장준환 감독님은 되게 섬세하다. 감정적으로 디테일하고. 상황에 맞는 감정을 즉흥적으로 많이 바꾼다. 그래서 콘티는 큰 의미가 없다. 예컨대 성당에서 설경구 선배를 만나는 장면에서 난 연희가 되게 강인하게 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우는 건 집에서 다 울고 씩씩하게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이곳이 성당이고,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면서 연희가 한 번 울지 않았을까라고 하더라. 그런 식으로 감정연기를 주문하신다.
-마이마이도 그렇고, 선데이서울도 그렇고. 극 중에 등장하는 소품들에 대한 이해가 적었을텐데. 소품이나 의상이 캐릭터는 입는 과정이기도 한데.
▶선데이서울은 들어만 봤다. 마이마이도 그렇게 위대하고 원하고 갈망하던 제품인지 몰랐다. 유해진 선배가 이거 하나 있으면 그냥, 이러면서 설명해줬다. 요즘으로 치자면 맥북?
-출연한 대부분은 선배 연기자들이 중년 남성인데. 그 시대를, 그 시대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나.
▶선배들 중에 그런 사람은 전혀 없었다. 다들 편안했다. 유해진 선배님은 수시로 농담을 많이 했고.
-'1987'은 김태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은가.
▶제작기 다큐 내레이션을 내가 했다. 출연한 선배님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 이렇게 많이 나오는구나 싶더라. 그 중 한명이 됐다는 게 의미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카피가 모두가 주인공이잖나. 그 모두 중에 나 하나 추가 됐다는 게 큰 의미다.
-작품이 끝나면 그 안에서만 머무는 캐릭터가 있고, 작품이 끝나고 그 뒤로 그 캐릭터는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지는 캐릭터가 있다. '1987' 연희는 후자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그런 생각 안해봤다. '아가씨' 때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숙희는 글쎄요, 어디서 잘 살고 있겠죠라고 답했다. 연희가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은 영화를 본 분들의 몫인 것 같다.
-김태리에게 2017년은 어떤 한해였나.
▶초반에는 뭔가 고민이 많았고, 중반에는 영화 두 개를 찍느라 정신 없었고, 지금은 드라마를 준비하고 '1987'을 홍보하느라 바쁘다.
-초반에 한 건 어떤 고민이었나.
▶(아~, 아~)뭔가, 뭔가, 음 지나간 고민이니깐. (쥔 주먹을 내리면서)
-이병헌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찍는데. 아직 방영 전이지만 나이 차이가 있는 중년 남성과 어린 여성의 로맨스라는 점에서 일각에서 비판하기도 하는데. 신경 쓰이진 않나.
▶(아~, 아~0) 잘 모르겠다. 아직 대본이 끝까지 안 나와서 저도 궁금하다. 신경은 글쎄요. 쓰이죠.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연기경력이 워낙 차이 나는 대선배님이기도 하고.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