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6만명을 동원한 '부산행'으로 실사영화 신고식을 치른 연상호 감독이 '염력'으로 돌아왔다. 좀비열차 다음에 초능력이라지만, 다르다. 여느 슈퍼히어로물과는 비슷한 얼개지만 전혀 다르다. '염력'은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된 아빠가 철거 용역들과 싸우고 있는 딸을 10년만에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블랙코미디에 용산참사를 연상시키는 장면들까지, 평범한 슈퍼히어로영화라고 하기에는 결이 다르다. '부산행'보다 '돼지의 왕' '사이비' 같은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과 더 닿아있다. 연상호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이 인터뷰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부산행' 다음에 왜 '염력'인가. 사실 '부산행' 다음에 준비했던 차기작이 '염력'을 포함해 하나 더 있었는데.
▶'염력'을 '부산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염력'은 차기작으로 준비했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하나는 '부산행'과 비슷한 색의 영화였고. 시나리오는 없었지만 이야기되던 것들 중 '부산행2'도 있었고, 액션스릴러도 있었다.
그런데 '부산행'이 칸국제영화제에 가니 사람이 좀 이상해지더라. '돼지의 왕'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뒤에 '사이비'나 '서울역' 모두 칸 초청을 못받았다. 그렇게 칸과 인연이 끊기나 싶었더니 '부산행'이 초청받았다. 그리고 많은 주목을 받고. 그랬더니 '부산행'으로 얻은 걸 놓치기 싫은 마음이 들더라. 막 마음이 괴롭고. 그러다가 만화를 그리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연상호 감독은 그래픽노블 '얼굴'을 이 기간 그렸다) 그러면서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좋아하는 거 해보자란 마음을 먹었다. 우리 또래는 좋아했던 영화들이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맨' '진짜 사나이' '미지왕' '반칙왕' '지구를 지켜라' 등의 영화들. 그런 걸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 기간 동안 공황장애가 있었다던데.
▶정확히 공황장애인 지는 모르겠다. 약을 먹지도 않고, 진단을 받은 건 아니니깐. 한동안 많이 힘들었는데 '얼굴' 그리면서 좋아지더라.
-사실 NEW에선 '염력'을 멀티캐스팅하고 이야기를 더 키워서 하자는 역제안을 했었는데.
▶'염력'을 그렇게 고쳐서 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위험요소들이 있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대한다면 이유가 있는 법인데 그걸 굳이 무릎 쓰고 해야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간에 한 번 엎기도 했다.
'염력'을 하게 된 건 배우들의 공이 크다. '부산행'이 칸에 가기 전에 류승룡을 만났는데 차기작이 어떤 게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염력'이라고 있는데 엎었다고 했더니 하고 싶다고 하더라. 심은경도 이미 하기로 했던 터라, 주연배우 둘이 생기니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용산참사를 모티프로 삼았나. '염력'은 말하자면 박근혜 정권 시절에 기획한 상업영화인데 용산참사를 모티프로 삼은 셈인데.
▶처음 기획할 때는 철거촌에 사는 초능력자, 슈퍼히어로물이였다.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이런 류의 기획들이 많았다. 사회성 있는 블랙코미디 영화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으니깐.
왜 하필 도시개발이냐면, 도시개발이 가장 이데올로기와 떨어져 있는 이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슈고. 또 다수의 이익과 연결돼 있다보니 사람들이 되게 불편해하는 이슈다. 용산참사는 정말 큰 비극이다. 아주 명확한 데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못 받은 이슈이기도 하고. 어쩌면 상업영화로서 공감 받지 못할 이슈이기도 하다.
난 '염력'에서 초인과 대항하는 빌런이란 게 특별한 악당이라기보다 그렇게 공감을 못받게 하는 시스템이고, 권력이길 바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기 쉽고, 불편해하는 이슈를 상업영화 소재로 택한 이유는.
▶'부산행'을 하고 난 뒤 예술가와 요리사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떤 요리사가 될까 고민했다. 호텔 레스토랑 주방장이나 장인 같은 요리사? 그런데 난 라면을 좋아한다. 특히 짜파게티를 좋아한다. 처음 짜파게티를 만들겠다고 한 사람은 분명 많은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왜냐하면 짜파게티는 라면이 아니니깐. 짜장면을 라면으로 만든다는 시도니깐. 만들고 나서도 당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짜파게티는 짜장면 같은 맛이 나지 않으니깐. 그런데 난 짜파게티가 좋다. 그런 맛을 내고 싶다.
실사영화라는 소재를 택한 순간 짜파게티 요리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창적인데 존중받지 못할지라도, 그런 맛을 내고 싶다.
-많은 초능력들이 있는데 왜 하필 염력인가.
▶'아키라'라는 일본만화를 보면 염력은 단순히 물체를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뇌가 힘으로 발현된다는 의미다. 생각이 그대로 힘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염력은 영화 주제와 밀집하다. 결국 이 영화는 힘에 대한 이야기다. 초능력을 갖게 된 개인과 시스템으로서 거대한 힘. 힘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이 두 힘에 대한 비교라고 생각했다.
-'염력'에선 여느 슈퍼히어로 영화들과 달리 초능력을 신기한 능력, 그 이상의 반응이 없다. 여느 슈퍼히어로영화들이라면 초능력으로 지구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구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능력에 경탄하기 마련인데. '염력'은 그 능력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돈벌이하고, 동남아순회 공연하는 정도랄까. 자본가 앞에선 그나마 전혀 의미 없는 능력이고.
▶그게 리얼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초능력을 본 사람들이 없지 않나. 유튜브 같은 데 초능력 비슷한 영상들이 올라오지만 신기해 할 뿐이다. 좋아요를 누르지만 딱히 어떤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염력'에선 초능력을 갖고 있는 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래야 나중에 정유미가 맡은 대기업 홍상무 입장과 비교될 수 있고. 그게 다른 초능력 영화들과 큰 차이라고 생각했다. 무생물인 조직이 갖고 있는 힘과 공포란 게 중요했다. 염력을 보여줘도 대기업 같은 권력 조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 그게 중요했다.
-'염력'은 아빠와 딸의 화해를 그린다. 신파 코드가 담겨있는데 그 온도를 엄청나게 낮췄다. 이런 소재를 택했으면 당연한 귀결인데도 이 정도로 신파 온도를 낮춘 건, '부산행' 신파 논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던데.
▶모니터 요원들 때문이다.(웃음) 주위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오히려 부녀 코드보다는 경찰에 아빠가 잡혀가는 데 더 반응이 높더라. '부산행' 영향 때문은 아니다. 너무 쥐어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파가 싫어서가 아니라 '염력'은 신파를 작동시키려 쓴 게 아니기에 이 정도 온도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연상호 감독의 전작들은 다 파멸로 달려가는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서 구원이랄지, 해원이랄지, 그런 게 딱히 없었다. 그런데 '염력'에선 소소한 행복을 결말에서 이야기하던데. 연상호 감독의 변화가 느껴진다. 아이가 생기니 달라지던가.
▶아무래도 그런 영향이 큰 것 같다. 딸이 4살인데, 아이랑 같이 어린이 애니메이션 같은 걸 많이 본다. 어쩌면 뻔하고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들인데 아이가 엄청 감동받는다. 그러면서 나도 아이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타요' 극장판, '뽀로로' 극장판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그런 영향이 아무래도 있는 것 같다.
-'사이비' '부산행'에 이어 '염력'까지 아버지 3부작이라고 할 만큼,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왜 그럴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릴 적엔 아버지가 무서웠고, 이해가 안됐고, 많이 싸웠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선지 좋은 아버지가 돼야겠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강박이 있어도 좋은 아버지가 되진 않더라. 나도 아빠가 되니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도 있고. 이런 생각들이 무의식 중에 투영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염력'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류승룡의 캐릭터가 굴곡이 있다. 밖에선 비굴한 아빠인데 딸 앞에선 고압적이고. 코미디를 하면서도 어떨 땐 꼰대고. 여느 영화라면 10년간 딸을 버린 아버지가 갖고 있을 만한 죄의식 같은 걸 그렸을텐데. 그런 게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아빠와 딸의 갈등이 해소될 때,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데.
▶글쎄, 내가 아는 대부분의 아빠들은 그랬다. 밖에선 비굴해도 안에선 꼰대고. 오히려 희생적인 아버지를 그렸다면 이 영화와 맞지 않았을 것 같다. '부산행'에선 감정을 정교하게 쌓아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폭파시켰다. '염력'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가편집 버전에서 19분 가량을 편집했는데. 어떤 장면들이 주로 담겼나.
▶철거민들의 상황이 많이 담겼다. 그 안에서 갈등이랄지, 고민이랄지, 화염병을 만들어야 하느냐 마느냐, 블랙박스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었고. 철거민의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게 그 장면들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해놓고 보니 철거민들이 겪는 상황을 보여주려면 이 영화 전체를 다 할애해도 부족한 일이더라. 그렇게 못할 바에야 속도감을 주자고 생각했다.
-염력을 사용한 액션은 크게 두 개 있다. 철거를 앞둔 시장에서 용역들과 싸우는 초반부 액션과 나중에 경찰 진압 과정에서 액션. 어떤 식으로 설계했나.
▶첫 액션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쁜 놈들을 물리치는 카타르시스를 가급적 빨리 보여주려 했다. 그래야 중반부가 염력과 그에 따른 반응들로 재미를 준다고 생각했다. 중반부는 사실상 악역들이 이끈다.
-경찰서를 탈출해서 철거 현장까지 도달한 뒤에 벌이는 초능력 액션은, 여느 슈퍼히어로물과 달리 멋들어지지 않는다. 통상 '슈퍼맨'처럼 하늘을 달아다니는 슈퍼히어로물은 구원자 혹은 구세주의 시선으로 액션을 처리하는 법인데, '염력'은 전혀 다른데.
▶경찰서 탈출부터 도달과정까지 그리고 해결까지 일련의 액션들이 시위의 정체성을 갖길 바랐다. 그 과정이 불완전하다. 민폐를 끼치고, 그리고 나선 구한다. 그건 것들이 시위 문화에 대한 우화로 여겨지길 바랐다.
-명백히 용산참사를 떠올리는 게 콘테이너에 있는 경찰을 구하는 것과 떨어지는 철거민을 구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구했나.
▶'염력'이 괴물 같은 용역, 나쁜 경찰과 철거민의 싸움으로 보여질까 우려했다. 용역이나 경찰 개개인도 결국 거대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피해자이니깐. 그래서 경찰 얼굴을 카메라로 많이 잡으려 했다. 그러니 그렇게 구하는 게 당연했다.
-정유미가 맡은 홍상무 캐릭터는 감독이 직접 만든 건가, 아니면 배우가 만든 건가.
▶같이 했다. 처음에 정유미가 만들어 왔는데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유미가 가진 어떤 모습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만들었다.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들도 거의 안쓰고 현장에서 다시 만들었다.
-박정민이 맡은 변호사는 통상 이런 영화에서 뒤통수를 치는 역할인데.
▶또 다른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지 않나.(웃음) '염력'은 클리셰가 가득하지만 디테일은 그런 클리셰들을 다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박정민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부녀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바리케이트는 명박산성의 은유인가.
▶그건 아니다. 공간을 설계하는데 옥상 같은데 설치하기에는 동선이 맞지 않았다. 마지막에 무너지는 무엇인가도 필요했고.
-결말이 여느 슈퍼히어로물과 다르다. 보통 슈퍼히어로물은 초인이 지구를 구하던가, 문제를 해결하면서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주기 마련인데. '염력'은 결국 초인은 거대 조직에 굴복하는 결말인데.
▶그걸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류승룡이 자기 스스로 잡히기도 하고. 결국 '염력'은 초인과 거대 조직, 개인의 행복, 이 세 축인데, 그런 결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에필로그가 있을 법 한데 없다. 류승룡이 굳이 그런 결말이 아니라 미세먼지를 돌려보낸다든지, 정유미가 어떤 식으로 됐다든지, 그런 에필로그가 있을 법 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긴 했다. 정유미가 구속된다든지, 그런 에필로그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런데 '부산행'도 마찬가지지만 거기까지 보여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극장 밖으로 나가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두 개 정도 생각하고 있다. 되게 하고 싶은 거랑 '부산행' 어게인 같은 거다. 되게 하고 싶은 건 호러고, '부산행' 어게인은 좀비물은 아니다.
-'부산행2'나 드라마 계획은.
▶없다. 다른 좀비물을 만들려고 하면 그럴 순 있겠지만 '부산행2'는 없을 것 같다. '부산행2'는 김수안이 성인이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부산행'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인 소니픽쳐스와 차기작을 논의했었는데.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SF물이고. 말하자면 할리우드 진출을 논의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됐나.
▶현재로선 진행되지 않고 있다. 할리우드 방식과 한국 방식이 많이 다른 것 같더라. 소니픽쳐스 외에도 다른 할리우드 작품들도 몇 편 제안을 받긴 했다. 그런데 내가 할 건 아닌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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