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규동 감독이 '허스토리'로 돌아왔다. '허스토리'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와 정신대 배상 소송을 벌인 관부재판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내 아내의 모든 것' '무서운 이야기' '간신' 등 민규동 감독의 전작들과 사뭇 궤가 다르다. 그가 왜 위안부 이야기를 해야만 했는지, 들었다.
-반민특위 영화를 오래 준비하더니 돌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허스토리'로 방향을 바꿨는데.
▶반민특위 영화를 몇 년 준비했는데 불행히도 잘 안됐다. 당시 그 이야기 속 캐릭터 중 하나가 위안부였다. 살아 돌아와서 응징하는 역할이었다. 그 여인의 전사로 사이판 생존기를 담은 시나리오도 썼다. 워낙 큰 이야기에 보기 힘든 이야기라는 소리들이 많았다. 안될 걸 알면서 왜 쓰냐고들 했다. 다시 그 이야기를 일본군 시점으로도 써보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남성 중심이었고, 당시에도 위안부는 금기시됐다.
그러다가 관부재판을 발견했다. 재판도 재판이지만 사비를 털어서 그 재판을 지원한 김문숙님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김문숙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이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실존 인물들을 영화 속에서 다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김문숙님 이름은 문정숙으로 바꿨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이름을 합친 것인가.
▶그렇다. 눈치챌지는 몰랐다. 앞 정부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를 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미션을 잘 수행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았다. 작명이란 건 결국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예컨대 김해숙 선생님이 맡은 배정길은 우리 어머니 이름에서 가져왔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셈이다. 원래 위안부는 김학순 할머니 전에 일본 르포 작가가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 쓰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 분의 성과 우리 어머니 이름을 합쳤다. 이상일 변호사는 내가 이상일 감독을 워낙 좋아해서 가져왔다. 이상일 감독도 재일교포이기도 하고.
-김희애가 맡은 문정숙, 김해숙이 맡은 배정길, 두 인물로만 포커싱을 맞추지 않았다. 4명의 할머니들에게 고른 역할을 맡겼는데. 상업영화로는 '변호인'처럼 두 명의 인물에게 포커싱을 맞추고 재판을 이끄는 게 더 감정을 울리는 선택이었을텐데.
▶재판을 한 인물로 계속 끌고 갔으면 더 감정적인 울림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면서 위안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위안부와 정신대를 통틀어서 손가락질하는 시선이 과거에 있었기에 정신대 할머니들은 끔찍한 시간을 겪었는데도 아니라고 부인하는 분들이 계셨다.
그래서 문숙 선생님이 맡은 정신대 캐릭터를 넣었다. 구타 후유증으로 치매를 앓고 있지만 끔찍한 그 기억만은 갖고 있는 분도 넣었다. 이용녀 선생님이 해주신 캐릭터다. 예수정 선생님이 맡은 캐릭터는 외강내유한 인물이다.
이렇게 여러 인물들을 통해 박제화된 피해자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기존 위안부 할머니 이미지를 차용해서 한 명으로만 가면, 감정적으로는 더 많이 울릴 수 있겠지만 '허스토리'는 그 이상을 담고 싶었다.
-왜 제목을 '허스토리'로 지었나.
▶95년에 만든 첫 단편 영화 제목이 '허스토리'였다. '제2의 성'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제목이었다. '여고괴담2' 모티프도 거기서 받았고. 돌이켜보면 그 제목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담은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여성의 연대. 가려졌던 여성의 역사.
-그래서인지, '허스토리'에선 한국이건 일본이건 변호사 캐릭터 정도를 제외하고 남자들은 위안부를 돈 받고 몸 판 여자로 본다. 일본 우익도 남자고. 반면 여자들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연대에 힘쓰는 캐릭터들인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난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대결도 아니요, 남성과 여성의 대립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지방선거 및 재보궐 선거 당선자 사진을 보면서 30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죄다 남성이지 않나. 여성들간의 연대와 공감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허스토리'에 더 힘을 준 건 맞다. 프레임에 여성들이 꽉 찬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 때 늘 듣는 소리다. 여자들만 나오는데 흥행이 되겠냐, 위안부 소재로 관객이 오겠냐는 이야기들.
▶뭐 지금까지 내가 한 영화 소재들은 늘 흥행이 어렵지 않겠냐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그런 질문이 두렵지 않았다. 오기도 생기도 에너지도 얻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상업적인 흥행이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싶다. 풀 스피드로 공이 날라오니 그 어느 때보다 풀 스윙을 했다.
-'허스토리'는 민규동 감독 영화치고는 교과서적이다. 여러 의미로.
▶위안부 사이판 영화 시나리오와 위안부 액션 영화 시나리오를 거치면서 이 이야기까지 도착했다. 그러다보니 감독의 자의식이 전면에 나서서 눈에 띄면 안되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영화 중에서 가장 짧은 회차에 찍었다. 데뷔작보다 짧다. 가장 롱테이크가 많고, 가장 클로즈업이 적다. 가장 기본적인 문법으로 가자고 마음 먹었다. 이미지에 대한 강박을 최대한 없애려 했다.
-영화 초반 나오는 대사 "내 똥 굵고 내 오줌 폭포다"는 대사는 동시대적이다. 재밌고.
▶주눅 들지 않은 당당한 여성들을 그리고 싶었다. 또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빠지기 쉬운 엄숙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김선영을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감정이입하기 쉬운 캐릭터로 그리려 했다. 편집되긴 했지만 김선영은 나중에 일본 우익들이 데모하면서 반대하는 피켓을 보고 "이 피켓들은 돈이 얼마나 들까"라고 하는 대사도 있었다. 김문숙 여사께서 영화는 재밌어야 하니 재밌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달라고도 하셨다.
-실존 인물들을 그려도 영화는 결국 허구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예컨대 일본 여관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불을 덮으면 더럽다고 거절해서 혼수 이불을 갖고 간 일화랄지, 할머니들이 재판 마치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노래를 부르는 게 하필 일본 군가라는 아이러니한 일화라든지, 그런 디테일한 것들이 실제다.
김문숙 여사께서 사비로 아사히 신문에 증인을 찾는다는 전면 광고를 낸 것도 사실이다. 일본인 증인은 실존 인물 두 명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학생들을 위안부로 보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인물과 실제로 한국에 와서 당시 학적부를 찾아서 증거를 찾아낸 일본인 선생님을 합쳤다.
김문숙 여사께선 가정사를 안 밝히시지만 그 당시 20억원을 넘게 쓰신 걸로 전해들었다. 영화와는 달리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 관광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도 하셨던 분이셨다. 지금은 에어컨도 없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관부 재판과 관련한 박물관을 운영하고 계시다.
-각 재판은 어떻게 설정했나.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재판으로 감정을 쌓는 게 아니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장면이기도 한 만큼, 각각의 목표를 설정했다.
첫 재판은 가장 시원하게 욕을 한다. 실제로 재판에서 욕을 너무 해서 자제를 시키면서도 그대로 통역을 했다더라. "그깟 300만원 다 쳐먹어라"는 대사도 실제로 했고, 통역까지 했다고 한다.
정신대를 보여줘야 하는 재판은 용서를 그리고 싶었다. 용서가 더 쉽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해숙 선생님 장면은 그 피해가 세대를 거쳐 유전되는 걸, 계속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재판정 세트가 단조롭고, 단조로운 화면이 계속되는 만큼 그걸 다르게 보여주려는 시도가 있었을텐데.
▶일단 카메라를 첫번째 공판 때는 들어가고 두 번째는 나오고 세 번째는 시계방향으로 돌고, 네 번째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도록 했다. 마지막에는 정지되는 방식으로 카메라 무빙을 설계했다.
'허스토리'는 내 영화 중에서 클로즈업이 제일 없다. 그 장치를 쓰지말자고 카메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클로즈업으로)강요를 하게 되면 본질을 못보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룹샷으로 프레임을 메우는 방식을 썼다.
-배우들이 워낙 쟁쟁한 베테랑들이기는 하지만 감독의 디렉션이 그래서 더 분명했을 것 같은데.
▶담담하게 하자고 주문을 많이 했다. 부담을 갖지 마시라고 했고. 그럼에도 회차가 워낙 적다보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데뷔작이 36회차였는데 '허스토리'는 34회차였다. 법정신은 4회차만에 끝내야 했다.
그래서 배우 뿐 아니라 스태프들 전체가 초긴장했다. 촬영 전에 배우들의 연기가 아닌 기술적인 문제로 NG를 내지 말자고 스태프들에게 이야기했다. 일단 배우들은 서로가 어떻게 연기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컷을 하면 박수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매번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다. 증인으로 나온 일본인 선생님 같은 경우는 연기 자체가 처음인 분이다. 판사로 나온 재일교포 배우 김인우의 실제 이모다. 일본인 배우를 섭외하려고 해도 아예 안 돼서 고민하던 차에 그 분이 해주시기로 했다. 이분은 연기를 실제처럼 받아들이셨다. 재판정 밖에서 일본 우익을 맡은 배우들이 소리칠 때부터 당신께선 실제 상황이셨다. 그래서 일본 우익을 맡은 배우가 애드리브로 "니혼징 데스까(일본인이냐)"라고 하자 이분이 "일본인이 아니라 인간입니다"라고 애드리브로 받아치셨다. 저런 게 살아있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김희애가 맡은 문정숙은 극 중에서 가정과 일 중에서 일을 택한다. 대사에서 "일이 좋다. 그게 내고, 아닌척하고 살고 싶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동시대적이고 직접적인데.
▶'허스토리'를 지금 만들면 지금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정숙 캐릭터야말로 지금 시대의 집단 무의식이 투영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딸이 김희애에게 "엄마로서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 모성에 대한 강요다. 하지만 일이 좋고, 그게 나란 걸 말할 수 있는 여성, 그리고 그런 여성이 성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은 승리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데.
▶극 중에서 "사과 받으면 뭐할 건데"란 대사가 있다. 그렇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내 삶이 바뀌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치유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허스토리'는 한편으로는 문정숙의 성장 서사다. 이기기만 하면 치유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이긴다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다. 승자의 역사가 히스토리라면, 진짜 승리의 역사가 허스토리인 셈이다. 세상은 안 바꿔도 우리가 바뀐다, 그게 이 영화의 승리의 서사다.
-'허스토리'는 대사로 주제를 전달한다. 자칫 위험한 방법일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대화의 영화다. 이미지가 아니고. 증언의 힘, 말의 디테일이 중요했다. 내 영화 중 어느 영화보다 그래서 대사가 많다.
-'허스토리'는 음악으로 울릴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대사가 드러나야 할 때는 음악이 조용하게 뒤로 숨는데.
▶김준성 음악 감독에게 음악으로 울리고 싶을 때마다 왼손으로 작곡해달라고 부탁했다. 편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내 영화 중에서 가장 수정이 적었다.
-민규동 감독 영화는 딱 떨어질 때도 있지만 길다 싶은 부분이 있는 영화들도 더러 있는 편이다. 그런데 '허스토리'는 민규동 감독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길게 간 부분이 없는데.
▶에필로그도 편집에서 한 차례 뺐었다. 지금조차도 더 짧게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이 이야기는 강요하지도 감정을 끌고 가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계속 경계했다.
-김해숙은 베테랑 연기자다. 소위 국민엄마고. 그런 배우를 쓸 때는 기존 이미지를 차용하든가, 아니면 다른 걸 보여주려 하거나, 고민할 수 밖에 없었을텐데.
▶색다른 변화보다는 밀도를 깊이 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김해숙 선생님은 매순간 두려움에 떨었다. 컷만 하면 울었다. 그래서 제발 눈물을 흘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 컷에는 한쪽 눈에서만 눈물을, 그 다음 컷에는 눈물을 안 흘리는 식이었다.
-김희애는 우아하다는 기존 이미지가 있다. 이 이미지에서 변신을 했어야 했는데.
▶드라마로는 이미지가 남지만 영화로는 내게는 완전히 백지였다. 이 배우가 변화를 열망한다면 마음껏 채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투리와 일본어 모두 새로운 도전이었다. 사실 김희애는 첫 리딩 전날 스트레스로 인한 경련으로 응급실에 실려갔었다. 사투리를 열심히 준비했는데 전날 다른 대사로 다 바꾸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일주일 정도 김희애 사투리를 보고 안되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첫 촬영이 영화 첫 장면인데 롱테이크로 갔다. 스태프들에게 30테이크 정도 가겠다고 했다. 지켜보고 사투리가 안되면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대사부터 사투리가 정말 좋더라. 김희애는 원래 애드리브를 안하는 배우라고 하더라. 스스로 한 번도 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첫 촬영부터 벌떡 일어나는 모습 등은 다 애드리브였다. 김선영이 놀라는 모습도 진짜다. 카메라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따라서 일어났다.
-다음 작품은. 준비하던 근현대사 소재인가.
▶모르겠다. 근현대사 시나리오를 써놓은 게 있지만 마음은 SF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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