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다..오보 소동 끝에 타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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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화 기자
신성일이 4일 새벽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핸드프린팅 행사를 하러 참석해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이다/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신성일이 4일 새벽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핸드프린팅 행사를 하러 참석해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이다/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신성일이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대를 풍미했고, 늘 이야기의 중심에 섰던 배우 신성일이 폐암 투병 끝에 타계했다.


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전남의 한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한국영화배우협회 측은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이 금일 오전 2시 30분께별세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의사가 신기해할 정도"라며 건강함을 과시하며 왕성하게 대외 활동을 펼쳤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게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되고 말았다.


고인은 오는 9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시상식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불과 며칠까지 시상식 참석을 놓고 논의해왔지만 결국 참석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고인은 최근 급격히 건강이 악화돼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지면서 가족이 빈소를 예약했다가 별세했다는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상태가 악화돼 세상과 이별했다.


고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무려 507편의 주연을 맡았다. 1960~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톱스타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명문 경북고에 합격한 그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둘 만큼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방황하던 그는 청계천에서 호떡 장사를 하며 재수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다. 인생이 바뀌었다. 1957년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 그때 신상옥 감독에게서 '뉴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이란 예명을 받았다. 신성일 본명은 강신영이다.


신성일은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다.


고인은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과 1964년 결혼했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신성일은 1966년 한 해 동안 무려 89편의 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바쁜 활동을 펼쳤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고인은 영화 제작, 감독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 등은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다.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은 제작자로 참여했다.


고인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이름을 한 번 더 바꿨다. 강신성일로 개명한 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가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고인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에는 앞장섰다. 스스로도 영화일을 하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2004),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2010), 제47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20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2013), 제37회 황금촬영상 공로상(2017),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상 공로상(2017) 등 숱한 상을 받았다.


영화계에선 고인의 업적을 기려 영화인장을 치르는 방안을 놓고 논의 중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아들 강석현(51)씨, 딸 강경아(53)·수화(48)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으며 조문은 이날 오후1시부터 가능하다. 발인은 11월6일이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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