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을 대표하는 은행 중 하나가 외국 자본에 헐값에 팔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헐값에 팔린 정도가 아니다. 온갖 음모와 이권이 얽히고설켜 있다. 정지영 감독은 이번에도 실화에 칼날처럼 카메라를 들이댔다.
검찰의 조사를 받던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얼마 뒤 이 남자와 사고 차량에 동승했던 한 여인이 자살한다. 이 여인은 자살하면서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해 수치심으로 자살을 택했다는 문자를 남긴다.
난데없이 성추행 누명을 쓴 양민혁 검사(조진웅). 막 나가는 꼴통 검사로 유명한 양 검사는, 그의 방식대로 누명을 풀려 한다. 그러다가 이 사건에 커다란 음모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살한 여자가 거대 은행 헐값 매각사건의 중요 증인이었던 것.
양 검사는 의문의 팩스 5장으로 자산가치 70조 은행이 외국자본에 1조 7000억원에 넘어간 희대의 사건에 금융감독원, 대형 로펌, 해외펀드 회사가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외국자본의 변호를 맡은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 김나리(이하늬)의 도움으로 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다.
정지영 감독은 '블랙머니'를 론스타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었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 실제 사건들을 영화화하고, '천안함 프로젝트' '국정교과서 516일' 등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그였기에 론스타 사건을 어떻게 재조명할지 관심이 쏠렸다. 희대의 먹튀 사건,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스캔들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아직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건을, 상업영화 틀로 어떻게 재가공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정지영 감독은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실화를 모티프로 하되 가공의 인물, 은행을 만들었다. 금융을 잘 모르는 관객을 영화로 안내하기 위해, 역시 금융을 잘 모르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검사이기에 해당 사건의 실체에 더 가깝게 갈 수 있으리라 설정한 것 같다. 모르면 당한다, 당하고도 모른다, 그러니 알고 분노하라고 쉽게 풀었다.
이 안전한 방법은 양날의 검이다. 관객이 양민혁 검사의 등에 얹혀 쉽사리 이 사건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든다. 양 검사와 그의 주변을 통해 온갖 설명을 쉽게 풀었다. 상업 영화로 안전한 선택이다. 113분에 이 사건을 담아내기 위한 선택이었을 터다.
반면 이 안전한 방법은 이 사건을 지나치게 도식화했다. 악마화했다. 이분법으로 나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 칼처럼 잘랐다. 경제 관료들이 외국 자본에 은행 팔아먹고 자신들은 큰돈을 챙긴다, 촘촘히 맺어진 돈과 권력의 끈으로 나라를 조종한다, 맞서 싸울 길은 함께 일어서는 길 뿐이다, 라고 외친다. 적을 명확히 하고 악마화하고 그리하여 분노하게 만든다.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양민혁 검사는 불법도 서슴지 않는다. 불법감청, 불법연행, 불법침입. 거악과 싸우기 위해선 소악은 괜찮은 모양이다. 아니면 정지영 감독은 '블랙머니'로 검찰의 이런 행태도 같이 꼬집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러니다. 꼴통 검사라는 설정으로, 이 아이러니를 용납하기엔, 정의롭지 않다. 정의를 이야기하며 불법을 감행하는 격이다. 실체를 찾아가는 노력은 어렵고, 불법은 쉽다. '블랙머니'의 아이러니다.
정지영 감독은 '블랙머니'에 많은 걸 담고 싶었던 듯하다. 모피아라 불리는 경제 관료, 탐욕스런 미국자본, 거기에 기생하는 대형 로펌, 권력에 길들어진 검찰. 맞서 싸우는 인권 변호사, 진실을 찾으려는 언론인, 정의를 외치는 노조. 그리고 회색지대에 있는 인물로 이하늬가 맡은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 김나리를 배치했다. 이 많은 것들은 영화에 고루 잘 담겼다. 이분법으로 도식화됐고,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라 큰 설명 없이 영화에서 각자 기능한다. 그렇기에 회색지대에 있는 김나리 캐릭터는, 마지막을 위한 도구적인 기능만 있을 뿐 이 영화에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블랙머니'는 3억짜리 술 먹는 사람은 악, 소주 마시는 사람은 선으로 그린다. 3억 짜리 술 먹어도 총각김치와 같이 먹는 건, 괜찮은 것처럼 그린다. 다만 유혹에 흔들릴 때,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단순한 화법은 안전하다. 이 안전한 화법이, 불법은 능력이지만 편법은 용서 못하는 이 세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11월 1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