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축구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수는 누구일까. 축구 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펠레(1940~2022)와 마라도나(1960~2020)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 세계 축구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은 단연 장 마르크 보스만(61·벨기에)이다. 축구 선수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그가 유럽 축구 선수들의 자유 계약 시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1990년 보스만은 소속팀 벨기에 리그의 리에주와 계약 만료 후 프랑스 됭케르크로 옮기려 했지만 리에주가 과도한 이적료를 요구해 무산됐다.
계약이 끝난 뒤에도 소속 선수의 보류권을 갖는 유럽 축구의 불합리한 점에 분노한 보스만은 5년 간의 법정 공방 끝에 1995년 자유를 쟁취했다. 이를 통해 모든 유럽 축구 선수들은 계약 만료 6개월 전부터 사실상 다른 구단과 자유롭게 이적을 논의할 수 있는 FA(자유계약)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올해 12월 15일은 유럽 축구 선수들을 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른바 '보스만법(法)'이 제정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보스만법은 유럽 축구 산업의 지형도마저 바꿔 놓았다. 과거에 비해 자유롭게 다른 구단으로 이적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축구 선수들의 이적료와 연봉이 수직 상승했기 때문이다.
보스만 법 제정 이후 소속 구단은 스타 선수들을 다른 구단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약 만료 전에 거액의 연봉을 보장하는 연장 계약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선수를 다른 팀으로 보낼 경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이적료를 받으려는 유럽 축구 구단의 접근도 본격화하면서 선수들의 이적료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자연스레 유럽 축구 클럽들은 더 많은 돈을 선수들에게 써야 했다. 이 와중에 중소 규모 클럽들과 빅 클럽의 격차는 21세기 들어 더욱 커졌다. 물론 유럽의 작은 클럽에서 성장한 선수가 빅 클럽으로 이적하면서 중소 규모 클럽들은 이적료를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빅 클럽 사이에 주고 받는 이적료에 비해 매우 적은 수준이었다. 대부분 작은 클럽에서 빅 클럽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은 어린 나이여서 비교적 헐값의 이적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보스만법 이후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끌어모을 수 있게 된 빅 클럽을 중심으로 유럽 축구는 거대 산업이 됐다. 가장 세계화된 스포츠 종목인 축구의 중심지로 군림해온 유럽 시장에 미국, 러시아, 중동 자본이 대거 유입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보스만 법은 축구 선수 '중계 무역' 시장도 활성화시켰다. 보스만이 유럽사법재판소에서 리에주를 상대로 승소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제는 EU(유럽연합)가 EU 회원 국가 국민들에게 부여한 이주 노동의 자유였다. EU 회원국 소속의 선수라면 다른 EU 회원국 프로 리그로 이적하는 데 제도적 제약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보스만법 제정 이후 유럽 축구에서는 프랑스 국적의 선수가 이탈리아로 이적할 때 해당 선수는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 규정에서 예외가 됐다. 당시 각 유럽 축구 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는 클럽당 3~5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국 선수 보호를 위한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국이 아닌 EU 회원국가의 프로축구 리그에서 뛸 때 EU 회원국 선수들이 사실상 '내국인' 대접을 받게 되자 유럽 구단들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선수들을 더 많이 영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보스만법 이전에는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 규정이 없던 네덜란드 리그는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선수를 데려와 비싼 이적료를 받고 유럽 축구 빅 리그에 이들을 팔 수 있었다. 하지만 보스만 법 제정 이후에는 이같은 축구 중계무역이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를 다수 보유했던 프랑스와 브라질을 식민 지배했던 포르투갈까지 확산됐다.
보스만법의 가장 큰 영향력 중 하나는 국가간 전력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세계 축구를 좌지우지했던 유럽과 남미의 축구 강국이 아닌 국가의 선수들이 유럽 프로축구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첫 신호탄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발생했다. 당시 월드컵에서 8강까지 오른 세네갈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프랑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세네갈 선수들은 개막전 상대였던 프랑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이 경기에서 승리해 8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2년 뒤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Euro)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했던 '신데렐라' 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리스의 골키퍼였던 니콜리디스도 "그리스의 핵심 선수들이 유럽 빅 클럽에서 뛰고 있어서 이제 아무도 잉글랜드,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팀과 경기할 때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프리카 국가 역사상 최초로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모로코도 26명의 스쿼드 가운데 20명이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축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한국과 일본의 경기력도 보스만법 이후 양국 대표팀 선수들이 대거 유럽에 진출하면서 급상승했다.
한국은 2010년 남아공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고 일본도 2010년 남아공에 이어 2018년 러시아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두 16강에 진출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참가한 26명의 스쿼드 가운데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던 선수는 일본 19명, 한국 8명이었다. 이는 모두 보스만법이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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