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 딱 한가지가 있다. 이 무슨 지나가다 벼락맞을 소리냐고? 잠시 신의 눈을 참칭해보자.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내 인생의 결말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다면 이 삶이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겠는가.
전지전능한 신이야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인생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은 어디 그러한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두 컷짜리 만화 '조삼모사'를 보고 낄낄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그렇기에 우리네 삶은 매 순간이 새롭고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 웃고 울기도 한다. 그래서 "La Vita E Bella". 인생은 아름답단다. 바로 이 점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 어쩌면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리라.
지난 2000년 개봉한 이정재 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됐다. '레이크 하우스'. 이 할리우드 판 '시월애'는 지난 1994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에서 호흡을 맞춘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이 12년 만에 연인으로 재회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눈길은 단지 외적인 측면일 뿐.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시월애'에 비해 그리 새로울 게 없다. 배경과 주인공의 모습만 달라졌을 뿐, '시월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약간의 다른 점도 있다. '시월애'에서 전지현의 직업이 성우였지만 '레이크 하우스'에서 산드라 블록은 의사로 등장한다. 또 이정재가 살던 바다에 지어진 '일마레'는 호수위에 지어진 '레이크 하우스'로 바뀌었다. 하지만 기존의 극 흐름과 애피소드는 동일하다.
영화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찾던 산드라 블록이 레지던트 과정을 끝낸 후 시카고의 한 병원에 취직하며 시작된다. 2006년 겨울. 산드라 블록은 그 동안 세들어 살던 집을 떠나며 다음에 올 세입자를 위해 우편함에 메모를 남겨둔다. 이어 이 메모는 2004년을 살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에게 전해지고 편지함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2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며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다른 나라 관객들이야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관객들의 머리 속에서 '시월애'를 지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다수의 한국 관객들에게 시월애는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영화이다. 극장 관객수를 따지는 게 아니다. 이미 '시월애'는 추석이나 설 명절 때 여러차례 특선영화로 방영되는 영예(?)을 안았으니까.
할리우드 것보다 우리 것이 낫다는 어설픈 '토종예찬'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없는 내용이야 원작에 충실했다는 변이 가능하기에 넘어가더라도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에는 무엇가 아쉬움이 남는다. '레이크 하우스'에서 호수 위에 지어진 집과 시카고의 가을 배경은 분명 찬탄할 만한 것이나, '시월애'의 그것에는 한 수 뒤져 보인다. 또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 사이에서 오가는 애틋한 감정 연기는 개연성을 짚어주지 못해 자칫 '감정의 과잉'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인생에서 그 결말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난이다. 이는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생이나 드라마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듯, 끝을 알고 보는 영화 역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단, 토종 '시월애'가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보는 재미만큼은 쏠쏠하리라. 아직 '시월애'를 보지 못한 국내 관객들에게는 이번 영화가 올 가을 가슴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토종 원작과 리메이크 작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볼지 고민할 사람들에게 그 선택이 기쁨이 될지 후회가 될지는 확답을 해줄 수 없다. 어쩌겠는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이것이 신과 다른 인간의 한계니까. 12세 관람가. 오는 31일 개봉.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