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젯밤 혼자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부러진 화살'을 봤습니다. 시사회 때 못 갔는데 개봉 이후 워낙 화제를 모으는 터라 부랴부랴 인근 극장을 찾았습니다.
영화는 지난 2007년 소위 '석궁테러사건'을 둘러싼 법정공방을 극화했습니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가 교수지위 확인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자, 2007년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박홍우 부장판사를 집 앞에서 석궁으로 쏜 혐의(살인미수)로 기소된 사건이죠. 영화 막판 자막으로도 나오는 것이지만, 김 전 교수는 대법원서 징역 4년이 확정돼 복역한 뒤 지난해 1월 출소했습니다.
딱 한 번 눈물 찔끔 짜고 극장을 나오면서 반문했습니다. "난 왜 지금 갑갑하면서도 통쾌할까?" 아마 관객 눈에 비친 사법부, 특히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부장판사(문성근 분)가 오히려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아 그랬던 것이겠죠. 오죽했으면 김 전 교수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까지 외쳤겠습니까. 또한 김 전 교수(안성기 분)가 이런 사법부와 재판장을 향해 꼬장꼬장하게 '법대로'를 외쳤기 때문에 유쾌 상쾌 통쾌했던 것이겠죠.
이쯤에서 김 전 교수 역을 맡은 안성기라는 배우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유니세프 친선홍보대사, 굿다운로더 캠페인 홍보대사 등 우리나라에서 값지고 좋은 일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서는 배우. 아역으로 데뷔해 '남부군' '하얀전쟁' '투캅스' '태백산맥' '박봉곤 가출사건' '퇴마록 ''인정사정 볼것없다' '실미도' '아라한 장풍대작전' '형사' '한반도' '라디오스타' '화려한 휴가' '7광구' '페이스메이커'까지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는 현역 배우. 대충 이런 이미지겠죠, 일반 관객한테는.
하지만 기자한테 안성기라는 배우, 아니 안성기라는 어른은 조금 각별한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찬바람이 휑하니 불던 지난 1995년 2월 어느날이었을 겁니다. 기자가 첫 해외 출장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를 가고, 그곳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태백산맥'의 배우 안성기와 한 방에 묵었던 때가요. 건너 편 방에는 여배우인 오정해와 정경순, 또 다른 방에는 임권택 감독과 제작자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묵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투숙기간 내내 더블 침대를 썼는데 밤새 기사원고(그때는 200자 원고지에다 쓰던 시절이었습니다)를 쓰느라 뒤척뒤척 깨작깨작하던 이 철없고 매너 없는 기자를 당신은 그저 '미소'로만 봐주셨죠. 그러다 결국 하신 말씀이 "김 기자, 나 맥주 한 잔 하고 올게" 정도였습니다. 그때 어찌나 무안하고 제 자신이 괘씸하던지요.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김 기자, 원고는 잘 보냈어?"라고 챙겨주기까지 하셔서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임권택 감독의 '축제' 촬영 현장이라든가, '라디오스타' 등 출연영화 인터뷰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데, '인간' 안성기는 스크린에 비친 '성실한 배우' 안성기와 거의 다름이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불법 다운로드를 그만하자"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자"는 구구하고 절절한 '호소'가 대중한테 먹힌 것도, 안성기라는 배우의 '신실한 공인'과 '믿음직한 어른' 이미지 덕분 아니었을까요.
'부러진 화살'의 김 전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법부라는 '골리앗'에 맞선 김 전 교수는 안성기의 몸을 빌려 진짜 '다윗'이 됐습니다. 상식과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환한 미소와 소시민적 감성을 잃지 않은 김 전 교수와 안성기는 그래서 절묘하게 오버랩됩니다. 만약 5억원짜리 저예산 영화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도 성공한다면, 그 공의 8할은 안성기, 당신 몫입니다. 그리고 이런 배우이자 어른이 우리 사회에 있어 행복합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