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2월 1일. 조철현 대표가 영화일을 시작한 날이다.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소리를 듣고 영화사는 일요일도 출근하나란 생각에 2월 1일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물론 일요일이라 사무실 문은 잠겨있었다. 그렇게 영화일을 시작했다가 당시 영화 홍보로 이름을 날렸던 이준익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으로 같이 영화사를 차렸다. "카피나 보도자료만 쓰지 말고 시나리오를 써보자"는 이준익 감독의 제안으로 둘이 강화도로 가서 '간첩 리철진' 시나리오를 썼다. 강화도로 간 건 마침 신문기사에 강화도에 간첩이 나타났다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제작과 시나리오 작가로 발을 디뎠다. 투박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이 켜켜이 쌓인 덕이기도 하다. 영화 감독이 되려 한 것도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준익 감독이나 조철현 대표나 영화계에 소문난 빚부자들이었다. 영화 수입하다 망해서 빚지고 영화 제작하다 망해서 빚졌다. 도망 안가고 열심히 갚아 갔지만 결코 쉬운 삶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사도'로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다.
허탈했다. 빚에 쫓길 때는 호랑이처럼 무서웠는데, 빚이 사라지니 사는 힘도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려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인생 60 전에 한 번 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영화 감독으로 처음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몽유도원도'였다. 조명받지 못하고 사라진 문화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찌어찌 엎어졌다.
고민하던 차에 이준익 감독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훈민정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은 조철현 대표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연을 갖고 있다. 홍릉의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식당에서 일하며 홀로 외아들을 키웠던 어머니는 나이 일흔에 처음 한글을 배웠다. 칠십 노인네가 방에서 공책에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써놓고 "하하하"하고 웃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인연을 바탕으로 조철현 대표는 조철현 감독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비화를 다룬 '나랏말싸미'는 그렇게 출발했다. 송강호와 박해일이 합류했다. 고 전미선과 함께 했다. 현장에서 조철현 감독은 "철 감독"으로 불렸다. 대표라고 부를 때는 "조 대표"라고 불렸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 6월 27일 진행한 인터뷰라, 철 감독이 아닌 조 대표에게 '나랏말싸미'에 대해 물었다.
-왜 '나랏말싸미'를 연출작으로 결심했나.
▶지금 이 시대에는 전쟁영웅보다 문화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훈민정음은 국가 문제를 제정하는 큰 작업인데도 불구하고 공식 기록이 아주 적다. 왜 그런 큰일인데도 이렇게 기록이 적을까 궁금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세종대왕이 자식들과 궁녀들, 그리고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비화를 들으면서 자랐다. 유교 국가에서 금기시됐던 불교계의 도움을 받아서 문자를 만들었다면, 그렇게 관련 기록이 적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훈민정음과 관련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관련한 전문가들을 두루두루 찾아다녔다. 배유안 작가의 '초정리 편지' 판권을 사서 고민해보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에 허구적 상상력과 서사적인 맥락을 어떻게 넣을지 고민했다.

-'나랏말싸미'가 여느 세종대왕 한글 창제와 다른 부분은 스님이 큰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인데.
▶법주사에 갔다가 한글 창제에 신미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와 닿아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인연이 이어지는 게 '사도'를 찍고 이준익 감독, 박시백 화백 등과 팝캐스트를 찍었는데 마침 그 팝캐스트를 진행한 출판사에서 책을 선물해줬다. 그때 받은 '용재총화'에 훈민정음은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음율 원리에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더라. '한글의 발명'이란 책에서 파스파문자와 한글의 연관성을 봤다. 신미스님 평전인 '훈민정음의 길'을 쓴 박해진 작가를 소개받아 자문으로 뒀다. 그렇게 해서 신미스님이 범어와 파스타 문자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역으로 재구성했다.
세종대왕은 원나라의 세조처럼 문자를 만든 다른 나라 왕들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북아시아의 표음문자는 대부분 산스크리트 문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세종대왕와 신미스님의 연결고리를 착안했다. 영화 첫 부분에 세종대왕이 기우제를 드리는데 제관이 "유세차 모년 모월" 이런 식으로 축문을 읽자 세종대왕이 "우리 땅의 신령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아 듣겠냐. 우리말로 해라"고 하는 장면을 넣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동기를 그렇게 넣었다.
-세종대왕과 신미스님의 관계는 어떻게 풀었나.
▶둘 다 서로에게 프로타고니스트이자 안타고니스트로 설정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당시 세종대왕은 앞선 왕들도 못했던 불교 개혁을 단행했던 왕이다. 불교계에선 어쩌면 원수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한글을 만드니 당연히 그런 관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연결고리와 둘을 이끄는 사람을 소헌왕후로 설정했다.
-사극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옛것에 빗대 말하는 법인데.
▶유교와 불교가 나뉘어서 싸운 게 아니라 한글을 만들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쳤다. 당파를 나눠 싸우지 말자는 게 지금의 시대정신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불법의 정수에 대해 그러더라. "주인도 나그네도 없다. 주인 되서 떠나는 나그네가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주제다.

-송강호와 '사도'에 이어 '나랏말싸미'로 인연을 맺었는데. 영조를 하고 세종대왕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송강호는 현장에서 정말 자신이 연기한 영조와 차별화를 이루려 엄청나게 노력했다. 조금만 신경질적이면 영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종대왕을 연기하면서 끝까지 (감정을)눌렀다. 모든 사람을 다 안고 가는 리더. 그런 군주의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움을 정말 훌륭하게 그렸다.
-신미스님을 맡은 박해일은 어땠나.
▶박해일은 '몽유도원도'의 안평대군 역으로 제안했다가 거절 당했던 적이 있다. '나랏말싸미' 시나리오를 쓰면서 신미스님을 지적인 꽅통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좋을까, 사실 저 사람(박해일)이 아니면 안될텐데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송강호가 박해일을 맥줏집으로 불렀다. 송강호가 박해일에게 "이 영화 주인공은 세종이 아니라 신미야"라고 하더라. 그때 박해일에게 이 영화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박해일이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하더라. 박해일은 정말 대단하다. 많이 배웠다. 자기가 세운 원칙을 끝까지 지킨다. 철저히 스님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촬영 내내 그렇게 살더라.
-'나랏말싸미'는 전미선이 맡은 소헌왕후와 궁녀의 이야기들도 적잖은데.
▶'나랏말싸미'는 소헌왕후란 대장부를 통해 두 명의 졸장부가 대장부가 되는 이야기기도 하다. 같이 일을 꼭 해야 할 상대가 적이고 동지다. 그렇게 영화를 일반적인 서사와는 다르게 꾸미려 했다. 또 당시 궁녀들은 여성 전문직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녹여내려 했다. '나랏말싸미'는 8세부터 88세까지 즐길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랐다. 그런 영화로 관객들이 받아들였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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