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가요계에 제 아무리 오랜 기간 두각을 나타낸 뮤지션이라도, 귀를 자극할 만한 트렌드를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팀이 있으니, 바로 17년차 혼성밴드 자우림(이선규 김윤아 구태훈 김진만)이다.
2년 2개월 만에 9집 '굿바이, 그리프.'(Goodbye, grief.)로 돌아온 자우림은 귀에 쏙들어오는 유행가가 아닌 자신들만의 확고한 음악 스타일을 표현하고 공유하려 했다. 앨범 전반에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 어두운 세상에 분홍색 크레파스로 덧칠하길 당당히 거부한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자우림을 만났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달리 부드러운 눈빛으로 질문마다 꾸밈없는 생각을 조곤조곤 늘어놓는 이들이다.
"영국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의 공식적인 마지막 앨범이 9집이잖아요. 어릴 적엔 9집을 낼 때쯤이면 정말 최고의 경지에 오른 느낌이겠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아무렇지 않네요. 그냥 스스로 뿌듯하네요."(이선규)
올해로 데뷔 17년차를 맞이한 밴드답게 이번 앨범은 그들의 탄탄한 음악세계를 들려주고 있다. 총 11개의 신곡이 실렸다. 특유의 색깔은 여전하지만, 사운드를 덜어낸 전작과 달리 촘촘히 채워 넣었고, 편곡에도 각별히 공을 들였다. 4집부터 8집까지 비우는 작업을 했다면, 이번엔 다시 채우는 작업 방식을 택했다는 것.
"데뷔해서 3집까지는 스튜디오 녹음 경험도 적고 자신감도 없어서 단점을 보완하고자 사운드를 더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많은 것을 체험한 뒤 이젠 날 것인 상태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덜려고 했었죠."(김진만)
"언제부턴가 앞으로 몇 장을 더 작업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치열하게 음악하기 위해 채우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녹음 과정에서 멤버들끼리 의견 다툼이 있던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미묘한 갈등 상황도 있었어요. 개인적으론 좀 더 해보자고 부추기고 괴롭히면서 멤버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기긴 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갔죠.(웃음)"(김윤아)
타이틀곡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청춘에 대한 아련함이 담겨있다. 하지만 청춘을 무조건 낙관적으로 바라보진 않는다. 곡을 쓴 김윤아는 말랑말랑한 사랑 얘기보단 씁쓸하고 냉혹한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걸 더 얘기하고 싶어 했다.
"벚꽃이 필 무렵이었는데,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우고 돌아섰는데 아파트 단지 가로수 길에 꽃잎이 떨어지는 거예요. 멜로디와 가사가 떠올라 곧바로 전화에다가 녹음을 했죠. 당시 복잡한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요.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 벚꽃도 수년째 보지만 매년 다른 것 같아요."(김윤아)
수록곡 '안나(Anna)'와 '디어 마더(Dear Mother)'는 엄마가 된 김윤아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교육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은 곡이다. 김윤아는 "자기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이야기라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교육 제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우림은 지난 2011년 출연한 MBC 경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통해 그간 자신들이 해왔던 음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예전엔 곡 구성에 훅이 들어가고, 클라이맥스에서 터트리고 이런 히트공식이 있었는데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면서 그런 고정관념에서 자유 해졌어요. '감동을 준다면 청중도 움직인다'는 확신이 생겼죠. 이번 앨범에도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반영된 것 같아요."(김윤아)

1997년 데뷔 '헤이 헤이 헤이' '매직 카펫 라이트' 등으로 이름을 알린 자우림은 어느덧 17년차 중견 밴드가 됐다. 긴 세월동안 멤버 교체나 탈퇴도 없이 밴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김윤아는 "멤버들끼리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외국 혼성밴드를 보면 그 문제 때문에 망가진다"고 웃었다.
김진만은 "다들 욕심도 없고, 캐릭터가 이러니 죽자고 싸울 일이 없다"며 "사실 대중들은 보컬인 (김)윤아가 자우림인 줄 알고, 남자 멤버들은 구분을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멤버들이 이를 질투하고 더 유명해지길 원했다면, 또 윤아가 솔로를 하겠다고 했으면 이렇게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우림 멤버들은 이제 모두 40대를 넘어섰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초행길이잖아요. 급하게 갈 필요 없이 이젠 옆 사람도 챙겨주면서 천천히 가야죠. 아름다운 것도 좀 보고...앞으로요? '늙은 젊은이' 같은 밴드가 될래요. 음악적으로는 퍼포먼스와 사운드는 경력에 맞게 충실하고, 정신적으로 영원한 젊은이, 수록곡을 작업하면서 곡을 많이 써놨는데 이번에 못 넣은 곡이 있어요. 40대이기에 표현할 수 없는 열정에 대한 건데 되게 과격한 노래에요. 10집에는 꼭 넣겠다는 생각이 들어요."(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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