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혼자' 김민희가 그리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스포有)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03.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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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다린다. 온다고 했다. 그래도 올지 말지는 모르겠다. 안 와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내심 왔으면 싶다. 기다린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다. 기다린다. 보고 싶다. 그래도 기다린다. 온다고 한 임은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린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아니다.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마침내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13일 기자 시사회가 열렸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불륜설의 주인공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가 9개월 만에 한국 공식 석상에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둘은 당당히 사랑을 고백했다. 그 고백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도 겹친다. 현실과 환상의 어슴푸레한 경계.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 사뭇 다르다. 시간과 기억, 공간을 즐겨 중첩해 왔던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 다르다. 홍상수 감독은 김민희를 만나 다른 지점으로 넘어선 듯하다. 에로스(사랑)야 그가 즐겨 다루던 소재지만 타나토스(죽음)가 이렇게 짙었던 적이 있던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는 사랑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다. 동전의 양면 마냥, 사랑과 죽음이 겹치고 쌓인다.

1부는 독일의 어느 도시다. 배우 생활을 하던 영희가 독일에 살고 있는 아는 언니 집에 머문다. 유부남 영화 감독과 사랑 이야기가 퍼지자 쉬러 왔다. 차라리 이곳에서 살고 싶다. 이곳으로 그 유부남이 온단다. 비행기표도 끊었단다. 영희와 언니는 올지 말지 모르는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둘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공감한다. "원해서 산 게 아니라 필요해서 산 것"이라며 10년 결혼생활을 반추하는 언니에게 영희는 "그랬구나"라며 공감한다. "수프가 먹고 싶었는데" "수프가 먹고 싶었구나" 둘은 공감한다. 둘에게 시간을 묻는 남자가 찾아온다. 모른다고 답한다. 산책하다 다리 앞에 우뚝 선 영희. 큰절을 한다. 다짐이 필요했다며. 나답게 사는 것, 솔직하게 사는 것. 시간을 묻는 남자가 또 찾아온다. 피한다. 둘은 암에 걸려 죽어가지만 아이들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든 남자를 만난다. 해변을 걷는다. 모래에 기다리던 그의 얼굴을 그린다. 시간을 묻는 남자가 또 온다.

2부는 강릉이다. 독일에서 돌아온 영희는 홀로 영화를 본다. 프로그래머 하는 선배를 만난다. 남자다. 거침없이 묻는다. 공감은 없다. 그런 일로 연기 그만하는 게 아니라고 다그친다.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커피숍에 간다. 또 다른 선배를 만난다. 남자다. 그 선배는 같이 사는 여자 덕에 힘이 잔뜩 빠졌다. 자기 할 말만 한다. 오랜만에 지인들과 술을 먹는다. 남자들은 자기 할 말만 한다. 영희는 사랑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 사랑을 논한다고 입을 닥치라고 한다. 영희는 솔직하게 살다가 곱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는 다 병신 같고,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여자 선배는 영희에 공감한다. 둘은 입을 맞춘다. 다음날이다. 숙소를 찾은 영희와 여자, 남자 선배. 시간을 묻는 남자가 유리창을 닦는다. 아무도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영희는 해변에 그의 얼굴을 그린다. 해변에 잠든다. 잠에서 깬 영희는 그 영화감독을 만난다. 영화감독은 영희에게 책을 선물한다. 안톤 체홉의 '사랑에 관하여'다. "헤어질 때가 온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어준다. 영화감독은 매일 후회한다며 후회가 달콤해졌다며 후회하다가 죽고 싶다고 한다. 영희는 다시 해변에서 깨어난다. 꿈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랑과 죽음이 오롯하다. 죽도록 사랑하거나, 죽을 때까지 사랑하거나, 사랑하다가 죽고 싶은 이야기. 영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이사이 시간을 묻는 사람이 찾아온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 영희는 찾아오는 시간을 피한다. 멈추면 찾아오는 시간에 납치된다. 살고자 하면 찾아오는 시간은 없는 듯 곁에 머문다. 허무하게 쏟아지는 말 속에 그래도 사랑하고자 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온다고 했지만 오지 않는다. 헤어졌지만 아직 보내지 않았다. 그 마음을 박종화의 시로 갈무리한다. "벗어야 하리라. 답답한 사랑도 벗어던져야 하리라. 꽉 찬 그리움도 훌훌 씻어버려야 하리라. 만나지 못해 발동동 만나서 더욱 애달픈 아픔도. 미련없이 잊어야 하리라. 툭 벗어 던져야 하리라"

그래도 잊지 못한다. 모래 위 그린 그림은 파도에 사라진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려야 하는 순간이 중요하다. 사랑이 지금을 있게 만든다. 시간이 창문 밖에 서성여도 사랑하면 지금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과거 홍상수 영화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김민희다. 김민희는, 김민희 캐릭터는, 과거 홍상수 영화 속 여자 캐릭터와 다르다. 누구의 뮤즈, 누구의 대상, 누구의 투사, 누구의 관계들 속에서 살아있던 여자들과 다르다. 오롯하다. 홀로 존재한다. 김민희의 아름다움이 오롯함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바니타스(정물화) 같다. 2부 첫 장면 홀로 영화를 보는 김민희의 얼굴, 해변에 누워있는 뒷모습, 시간이 거세된 듯하다. 바니타스의 핵심이 메멘토 모리 인 것처럼, 김민희의 정물화 같은 아름다움은 죽음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 홍상수와 김민희다. 이 영화로 김민희는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김민희는 누군가의 뮤즈가 아니다. 오롯하다.

3월23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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