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대 묘를 위에 쓰고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반대인 경우를 종종 본다. 선대 산소가 있는 산 위쪽에 후손의 묘를 쓰는 것을 역장이라 하여 대부분 금기시 하였다.
역장을 쓰면서도 명문가를 이룬 집안도 있는가 하면 선대로부터 역장을 쓰면 집안이 망한다며 절대 역장을 하지 말라는 집안도 있다. 역장은 후손이 조상보다 위에 앉아 있는 격이다. 즉 조상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에 후손을 매장한 형태로 소위 이러한 배치 양식을 역장 혹은 묘역을 압장(壓莊), 도장(倒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능선에 여러 개의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나 거꾸로 쓰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며 낯설다.
역장의 대표적인 곳이 군포시 속달동의 수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된 일명 '동래정씨가묘(東萊鄭氏家墓)'이다. 필자의 선대 묘이기도 한 세조 때 명신 동래정씨 정난종(1433?1489) 자손들의 족장(族葬) 묘역이다. 대개 능선 맨 위에 선대 묘를 쓰고 아래에 후손들의 묘를 차례로 쓴다.
그러나 정난종 묘역은 이와 반대로 선대를 아래에서부터 점차 위로 안장하는 특이한 형태이며, 조성할 당시의 모습이 원형대로 잘 보전돼 있고 신도비와 묘비 그리고 문인석 등 석물도 잘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연구에 중요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군포 동래정씨가 묘역 안에는 1467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워 호조참판에 오른 정난종 묘, 연산 현감, 풍기, 풍기, 금산, 순창, 초계 등 외직으로 아홉 고을의 군수, 창원과 연안 부사를 지낸 장남 정광보,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오르고 영의정을 지낸 둘째 아들 정광필, 그리고 정광필의 4남 정복겸 등의 묘가 줄지어 있는데, 아래로부터 위로 할아버지 - 아들 - 손자 순의 역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동래정씨는 정승의 자리에 오른 사람만 17명으로 전주이씨 22명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가문이다. 그 중 13인이 이 묘역에 안장된 정난종과 그의 둘째 아들 영의정 정광필의 후손이다. 정광필의 증손 정유길(정복겸의 아들)은 좌의정을, 정유길의 외아들도 좌의정을, 정유길의 증손 정태화는 영의정과 정지화는 좌의정을, 정태화의 아들도 우의정을 지내 한 집안에서 삼정승이 나오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정승을 지낸 삼학사 김상현과 그의 형 감상용은 정유길의 외손으로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사당동의 유래도 좌의정 정유길과 영의정 정치화의 사당이 있어 거기서 유래된 것이다.
철종 때 강화도령을 모셔오고, 관직생활 72년 중 재상만 33년을 하며 60년 회갑, 혼인 60주년을 기념한 회근례, 문과 급제 60주년의 회방연(回榜宴)을 치러 삼회대(三回帶)를 두르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영의정 정원용과 그의 아들 위당 정인보도 이들 후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정승과 명신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후손들과 호사가들은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두고 역장으로 묘를 써서 일어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금도 동래정씨 후손들 중에는 역장을 써서 정여립과 같은 모반이 일어났다며 역장이란 말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다. 요즈음도 만약 후손의 묘를 조상의 묘 위쪽에 쓴다면 소위 역장이라 하여 매우 흉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역장을 쓰면 역적이 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유학과 예학에 밝은 사대부 일수록 오히려 역장을 자연스럽게 썼다. 파주시에 있는 율곡 이이 묘로 가 보자. 율곡(1536-1584)의 파주시 자운서원 가족묘에는 이이의 맏아들 이경림이 가장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있고, 그 위에 이이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 합장묘가 있다. 그리고 가장 위쪽에 이이 자신과 부인 순으로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그리 멀리 않은 파주읍 향양리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우계 성혼의 사당과 가족묘 역시 역장으로 썼다. 젊어서 이미 덕망과 학문이 뛰어나 조선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명종 9년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 이이와 사귀어 평생지기가 된 우계 성혼 선생의 파주 산소 역시 아버지 성수침의 묘보다 위쪽에 모셔져 있다. .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낸 이정구 묘역도 맨 위가 이정구의 큰 아들로 인조 때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의 묘이고, 그 아래에 이정구의 장손으로 효종 때에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이상일의 묘이다. 그 이래가 이정구와 부인 권씨의 합장묘로 역장이다. 오히려 이를 두고 안내판에는 '순차적으로 묘를 쓰면 후손 중에 역적이 나올 묘 터라 하여 할 수없이 역장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충남 논산 고정리에는 양반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광산김씨 선영이 있다. 그곳에는 조선 예학의 거장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의 묘도 노송이 병풍처럼 에워싼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역시 광산 김씨 문중을 일약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중흥의 7대조 할머니 양촌 허씨의 묘소 위에 사계 선생의 묘를 써서 역장으로 했다. 또 양천 허씨의 아들 김철산 묘도 남편이 아래에 있고, 부인의 묘가 위에 있는 상하 쌍분의 역장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위치한 인천시 기념물인 하곡 정제두(1649-1736) 선생의 묘역도 역장이다. 그는 정몽주의 후손으로 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냈으며 현종 때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여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아버지의 묘가 정제두 선생의 묘 아래에 있다. 이들 외에도 역장을 쓴 예는 많다.
왜 선대를 아래에, 후대를 위에 쓰는 역장을 행한 것일까. 고려시대만 해도 '한 자락의 산에는 하나의 혈만이 있다(一山一穴).'라는 풍수지리적 관념에 얽매어 왕실과 권문세족의 능묘는 각기 다른 지역에 쓰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도 몇 십리를 떨어뜨려 묘를 각자 쓰는 경우도 흔했다.
한 장소를 택하여 일족의 조상을 매장하는 족장은 조선 초에 들어와 생긴 풍습이다. 사실 조선 중기까지는 역장이란 의미가 없었다. 묏자리를 위쪽, 아래쪽 보다는 좋은 자리인가 아닌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먼저 좋은 자리에 부모를 모시고 그 위에 자신을 비롯해 순서에 따라 안장하였던 것이다. 즉 명당이란 풍수적 관념보다는 부모 곁에 묻히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다.
원래 세종의 영릉도 신하들이 명당을 찾아 능을 쓰고자 했으나, 부모 곁에 묻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세종의 주장으로, 부왕 태종이 묻힌 헌릉 옆 능선 자락에 묻혔다. 이렇게 부모 묘 옆에 묘를 쓰다 보니 각기 떨어져 쓰는 별장(別葬)보다 자연스럽게 동일 지역 내 안장하는 족장을 행했다. 부부도 각기 따로 안장하는 별장보다도 함께 묻히는 합장이나 쌍분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처럼 족장을 선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족장의 풍습이 생겨난 것은 묘들이 떨어져 있어 관리하기가 어렵고 성묘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 후손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워 묘를 잃어버리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을 시정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하나의 산자락에 조상과 후손의 묘를 일렬로 조성하는 족장이 유행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도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 다음과 말했다. "고려의 능침을 각각 다른 지역에 써서 성묘가 불편하고 관리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경비가 많이 들며, 손이 미치지 않는 관계로 누구의 것인지 판명키 곤란하고, 또한 묘가 각지에 산재함으로써 국비가 많이 드니 일족의 사망자는 같은 산에 장사하라"며 족장을 권장했다.
태종은 이러한 족장 및 족분제(族墳制)을 권장하기 위해 같은 혈 내에 안장하는 동혈장사법을 시행토록 하였다.
"내가 죽어서 중궁과 합장하고자 하는데 구천 아래에 같이 묻히고자 하려는 계교가 아니라 후세 자손이 배소할 때에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함이다. 빨리 고전을 상고하여 아뢰라. 내가 장차 능침의 땅을 점쳐서 수목을 심어 후일에 죽어서 장사할 곳을 준비하겠다."(『태종실록』 태종 17년 11월 계축조)
태종은 동혈법 시행 이유를 능침이 여러 곳에 분산되면 후손들이 참배하고 관리하는데 번거롭기 때문에 이를 덜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태조 건원릉도 족분제와 관련이 깊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만세 후에 묻힐 자리를 무학에게 묻었을 때, 무학은 지금의 건원릉 자리를 천거하며 대대로 이곳에 장사하여도 좋다고 하며 족분제를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한 산에 여러 묘를 쓰는 족장과 역장의 풍습은 풍수적 이유라기보다는 관리 혹은 참배와 같은 실질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런 역장과 족장 풍습은 조선 중후기로 내려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각장(各葬) 또는 따로 쓰는 별장이 성행하였다. 족장이 쇠퇴하고 별장이 성행하게 된 것은 생자는 군거를, 하지만 사자는 독거가 가능해 세대마다 각장을 하여 풍수의 요체인 지기를 많이 받고자 하는 발복 풍수설의 영향이 컸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풍수설에 현혹되어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서로 묘를 따로 쓰는 각장이 성행하여 한 묘역 내 여러 묘를 쓰는 족장제의 풍습이 없어져 분묘의 크기를 제한하는 분묘의 계한법을 만들었다고 했다. 묘를 따로 쓰는 각장의 성행은 묘송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같은 족장의 쇠퇴는 발복 풍수설 영향 이외에도 17세기 후반까지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 지내는 윤회봉사와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는 균등상속의 감소, 대신 장남 단독봉사와 재산상속도 장자에게 더 주는 차등상속제로의 변화 등이 영행을 미쳤다. 여기에 장자 계승을 우선하는 종법제의 확립으로 역장을 금기시해 후손을 조상의 묘 위쪽에 쓰는 것을 불경으로 여겼다.
-정종수 CST 부설 문화행정연구소(ICST) 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 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 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