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참 된 기억을 더듬어보자. 봉태규는 유쾌한 배우였지만 "나는 철들면 죽는다"는 듯 온 몸에 날이 서 있었다. 쉴 틈 없이 활동하는 에너지 넘치는 20대 개성파 배우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볐던 그를 한동안 볼 수 없었다. 봉태규는 그 사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몸이 아파 수술을 하고, 소송에 휩싸이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16일 개봉한 영화 '미나문방구'에서 봉태규는 재잘거리는 초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보여준다. 그 모습은 영화를 감싸고 있는 경주의 다정스런 풍광과 고운 자연광과 퍽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온 몸의 긴장을 쫙 빼고 아이들과 어우러져 추억의 문방구 게임들을 즐기며 스스로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다. 봉태규는 영화를 두고 "덜 재미있을 수도 있고 덜 웃길 수도 있고 덜 울릴 수도 있지만 그게 미덕"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건 봉태규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한 템포 낮아지고 느려진 그의 말에선 지난 시간의 영향이 역력했다. 이제 서른 셋, 봉태규가 철이 들었다. 느긋해졌지만 더 단단해졌다.
-최강희와 정말 오래된 친구 같더라. 그런데 잘 몰랐다고?
▶저 배우랑 같이 하고 싶다는 호감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같은 사무실이어도 잘 모르고 지냈다. 사실 누나가 먼저 다가오셨는데, 제가 예상치 못하고 깜짝 놀랐더니 누나가 또 의기소침해지시고, 저든 저대로 또 머쓱하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영화 끝나고 홍보 함께하고 하면서 더 편해졌다. 이제 조금 친해진 것 같다.
-고향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교사 역이다. 봉태규가 뭔가 다 내려놓고 연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미나문방구'도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내려놓고, 묻어가는 게 앞으로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기하며 나를 생각하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어때야 하는가가 첫번째고 상대는 어떤가가 그 다음 아닌가. '그 전에도 그랬냐'고 하시면 확실하게 그랬다고는 못 하겠다. 그렇게 접근한 게 영화로는 첫 번째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미나문방구' 전 단막극 '안녕하세요 귀신입니까'에서 힘이 쭉 빼고 담담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 같다. 당시에 '이렇게까지 힘 빼고 덜 표현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예전에 많이 표현하고 많이 보여드리려고 했었을 때보다 보는 분은 적었을지 몰라도 보고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다. 참 신기했다. 예전 현장에서는 막연히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파이팅이 넘쳤다. 그런데 열심히 한다는 걸 수치화하거나 형상화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이번엔 그런 생각을 아예 안했다. 편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스태프가 그런 나를 아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0년 '눈물'을 찍으며 매니저도 경험도 없던 저를 스태프가 챙기고 아껴주셨던 그런 느낌을 처음 느꼈다. 굉장히 묘하고 색다르게 다가왔다.
-영화에서만 달라진 게 아니다.
▶예전에 저를 아시는 분들은 재미없어졌다고 하시더라. 작년 개봉한 '청춘 그루브' 때는 더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르지만. 길게 쉬었던 탓 일수도 있고, 나이를 먹어서였을 수도 있다.
-예전 봉태규는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철들지 않겠어'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았던 몇 년 사이 철이 들어서 지금은 오히려 여유가 생긴 느낌이랄까.
▶몇 년 전의 내 인터뷰를 읽어본 적이 있다. '참 재밌는 녀석일세' 했다. 극단적이고 뒤가 없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더 뚜렷이 보이는 거다. 어떨 땐 안쓰럽기도 하다. 그렇게까지 어금니 꽉 깨물고 온 몸에 힘을 주려면 힘들지 않았겠나.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왔으니 이제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또 모른다. 나중엔 지금 모습을 돌이키면서 '이 별난 놈' 하고 있을지.
그 때는 오히려 불안했다. 남들은 일도 많이 하고 잘 되는 것 같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로선 불안하고 예민했다. 그러니 전투력이 넘쳤다. 여유가 없으니 툭 찌르면 반응이 탁 나오는 거고. 지금은 여유가 생겼고 한편으로는 무덤덤해진 거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하고 있는 거지.
-주위에선 어떤가.
▶어머니는 걱정을 하시더라. '우리 아들이 담배를 끊다니!'(웃음) 어머니는 '왜 산을 다니나', '애가 괜찮나' 아직도 걱정하신다. 어느 날은 10만원을 주시면서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그러셨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겠나. '엄마 아니야, 나 괜찮아' 해도 아직은 걱정이시다. 누나들은 좋아한다. 나도 이런 지금이 마음에 든다.
-예능프로그램 '화신' MC로도 전격 발탁됐다. 게스트 한 번 하고 눈에 띄어 바로 MC가 된 건가?
▶말 그대로 전격 발탁이다. 첫 녹화 앞두고 닷새 전에 연락이 왔다. 매니저 통해 '예능 해 볼 생각 없나, 화신 MC인데'하고 연락을 받고는 1초 '에?' 생각하고 '재밌겠다' 싶어 바로 하겠다고 했다. 저도 '제가 왜요?'하고 물어봤다. PD님은 녹화분을 보며 좋았고 MC로 적합하다 생각을 했다 하시더라. 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재미있다. 김구라, 신동엽 선배님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게스트 출연분을 보니 다른 사람 이야기를 굉장히 잘 듣고 핵심을 탁 정리하는 능력이 있더라.
▶외로워서 그런가보다. 사람이 고파서.(웃음) 제가 원래 많은 사람과 두루 지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사람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왠지 좋았다. 매주 같은 일을 하는 규칙적인 패턴도 신선하다. 나도 모르게 새롭고 재밌는 걸 찾게 된 건데, 쉽지 않은 일인 건 안다. 잘 됐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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