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침묵하기 마련이다.
지난해 가을 즈음, 강우석 감독과 몇몇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강우석 감독은 인터뷰가 아닌 자리에선 자기가 찍는 영화나 제작하는 영화에 대해서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겸연쩍은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그러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나 사람들, 세상살이를 두런두런 나눈다.
이날은 좀 달랐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강우석 감독은 '전설의 주먹' 흥행실패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크게 겪었다. 시네마서비스 제작영화들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면서 떠안은 빚들이 '전설의 주먹' 흥행실패로 다 같이 몰려온 탓이다.
강우석 감독은 한국 토종 자본으로 만든 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 최대주주다. 시네마서비스는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끈 회사지만 요즘은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대기업에 밀리고, 돈에 치이기 일쑤였다. 강우석 감독은 시네마서비스가 돈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기가 찍는 영화 흥행으로 메워왔다. 강우석 감독을 한국영화 승부사라고 부르는 건 단지 그의 영화 성격과 흥행사라는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그랬던 강우석 감독은 맥주 한잔을 건네며 담아놓은 이야기를 풀었다.
"'전설의 주먹'이 잘 되면 돌려 막으려 했던 빚들이 한 번에 몰려오니 죽겠더라. 심형래 입장도 이해가 되고, 이런 말 하면 안되겠지만 한강 다리를 가야하나란 생각도 들었다."
도움은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 강우석 감독은 "뜬금없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너 요즘 어렵지'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렵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고 끊더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 친구는 이러구러 돈을 모아 강우석 감독에게 큰 도움을 줬다. 강우석 감독의 표현을 옮기자면 "살려줬다".
강우석 감독은 "예전에 내가 '실미도' 하고 이런 저런 영화로 돈을 벌었을 때 그 친구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우석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자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은 바로 옆에 있어도 손이 안 닿는 경우가 있고,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손을 뻗는 경우가 있다. 그게 인연이고, 그런 인연은 어떻게 살아왔냐에 따라 닿는다.
강우석 감독은 돈이 말하기 시작할 때 입을 닫고 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그도 돈이었겠지만, 그는 더 큰 돈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
돈이 말하는 시대다. 영화계라고 다를 바 없다. 정글 같은 곳이라 외려 돈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스크린 독과점, 교차상영, 돈 없는 영화들은 설 곳이 없다.
찬바람이 막 불기 시작했던 지난 연말 즈음, 연상호 감독과 마주 앉았다. '사이비'를 막 내놓은 참이었다. '돼지의 왕'이 어렵사리 5년 만에 선을 보였는데, '사이비'는 2년 만에 내놓았으니 운이 좋다. 운도 실력이 따라야 한다. 투자배급사 NEW가 '사이비'에 투자배급을 결정한 덕이다. NEW는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최소한에 울타리를 춰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사이비'에 투자를 했다. 돈 벌려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술잔을 주고받다가 연상호 감독이 "NEW를 찾아가 마케팅 비용으로 5억원만 더 쓰면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었다"고 털어놨다. "'사이비'에 5억원을 마케팅 비용으로 더 쓰라고 할 것이라면 이렇게 만들면 안됐다"고 했더니 연 감독이 "(NEW에서)바로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답했다. '사이비'가 상업적이라기보다 작가주의 색깔이 훨씬 강하다는 의미였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느새 돈처럼 이야기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돈이 말을 하는 시대에 사람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 텐데, 돈인 양 이야기를 했으니 부끄러웠다.
영화계에 점점 더 돈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를 찾는 사람도 있고, 알아서 입을 닫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유구무언이다.
한국영화가 갈수록 국제영화제 초청이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영화감독은 작가여야 한다는 시대가 지나고 장르 안에서 노는 신예들이 늘어난 탓이지만 저간에는 돈 목소리가 깔렸다. 상업성이 충만하다고 판단하는 영화들에만 많은 돈이 쏟아지고, 분배되니, 점점 다른 목소리들이 사라진다.
아직 돈 앞에서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더 부끄럽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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