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내 아내의 모든 것'..민규동 감독은 작품마다 감정의 결을 아름답게 세공해서 보여줘 왔다. 그의 장점이다. 가끔 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다는 게 단점이기도 하다.
민규동 감독은 21일 개봉하는 영화 '간신'에선 자신의 그런 장점을 일부러 버렸다. 아니 애써 피했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간신' 전에 준비하려다 무산된 '백년전쟁'은 해방 후 반민특위 활동 과정에서 벌어진 남성 느와르였었다.
'간신'은 그렇기에 민규동 감독의 장점과 단점이 춤을 춘다. 이야기는 아름답게 세공 됐지만, 민규동 감독 특유의 감정을 따라잡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왜 '간신'을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간신'은 조선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왕의 총애를 받으려 일만명의 미녀를 갖다 바친 희대의 간신 임숭재가 옛 여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제작부터 수위 높은 노출에 영화계 안팎의 관심도 컸다. 그는 왜 그랬을까.
-원래 반민특위를 소재로 한 '백년전쟁'을 준비하다가 '간신'으로 선회했는데.
▶194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혹독한 시기를 거치면서 달라진 사람들의 대결을 그린 영화였다. 그 영화를 오래 준비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면서 예전에 눈 여겨 뒀던 '간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간신'은 내가 시나리오 마켓에서 심사위원을 할 때 주목했던 작품이었다.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백년전쟁' 만큼 숙성시키진 못했다.
그래도 단지 연산군이란 소재였으면 안 했을 것이다. 채홍사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왕을 위해 과장이 섞였겠지만 일만 미녀를 바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역사 속에서 남자들은 나중에 회복되고 복원이 되지만, 정작 피해자인 여자는 회복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반복되고 퇴색될까란 고민 끝에 피해자들이지만 조명을 받지 못한 여자들을 무대 위로 올리고 싶었다.
-'간신'을 원래 한자인 간사할 간(奸)을 쓴 '奸臣'이라 짓지 않고 간음할 간(姦)을 써 '姦臣'이라고 썼다. 첫 장면에 벌거벗은 여자 셋이 간음할 간을 형상화하고 그 모습을 왕이 그리는 건 영화의 방향을 소개하는 것이기도 한데.
▶간신의 전형적인 모습은 5분이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른 이야기, 기존 사극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을 찾았다. 그게 바로 여자들을 폭압적으로 다뤘던 시선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어야만 했던 여인들, 견딜 수 없는 고통들, 그런 것들을 탐하는 사람들.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견딜 수 없는 혹독한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여자가 마침내 왕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에 정당성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장면은 15세 이상 관람가로 영화를 기획했다가 청소년관람불가로 방향을 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간신'에선 많은 노출이 있지만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한다. 보통 베드신을 찍으면 어느 한 사람의 감정이나 두 사람의 감정을 담으려 하기 마련인데 그 것 마저 배제하고 거리를 두는 방식을 택했는데.
▶통상적인 에로티시즘을 담는 방식이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선 베드신이나 노출이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베드신에 감정을 담으려하면 자칫 그런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박적인 경계가 있었다. 정서가 들어가면 에로티시즘이 빛나는데 그렇게 되면 여자들이 겪는 아픔의 수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간신인 임숭재 이야기인 동시에 복수하는 여자인 단희의 이야기고, 거기에 왕의 이야기도 있다. 세 인물이 부딪히는데도 전작들과는 달리 감정의 교류를 애써 막는다. 감정의 교류는 막는데 상황설명은 해야 하니 중반 이후 약간 늘어지는 느낌도 있는데.
▶그 고민이 지금도 있다. 칸영화제 출품을 위해 했던 가편집본은 지금 버전보다 짧았다. 에필로그도 없고, 더 차가운 영화였다. 임숭재의 이야기인 건 분명하나 단희에 더 애착이 들어가다보니 그랬던 부분도 있고.
'간신' 제작비가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두 배다. 그런 것에 대한 책임도 있으니. 지금 준비 중인 감독 버전도 사실 짧다. 과거에 대한 부분도 없다. 감독판을 개봉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목표와 인생의 목표가 점점 더 심플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내 그릇에 이야기들이 넘쳐나곤 한다.
-임숭재 역의 주지훈과 단희 역의 임지연 베드신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관객들이 두 사람의 감정을 오해할까봐 일부러 만들었다. 사랑이나 연민이 아니라 임숭재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겁탈처럼 묘사했다. 원래는 눈으로 감정이 오고가는 눈의 정사였는데 그걸 겁탈로 그렸다.
-'간신'이 기존 민규동 영화와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리액션 장면이 많다는 점인데. 그 전에는 배우들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그 감정에 대한 반응(리액션) 장면이 많은데.
▶맞다. 내가 영화 뒤로 완전히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영화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였다면 '간신'은 망원경으로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스스로 경계했다.
-연산군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다. 그렇기에 김강우가 광기에 물든 연산군을 잘 하긴 했지만 좀 더 입체적일 수 있었는데란 아쉬움도 남는데.
▶그렇다. 그래서 입체적으로 그리려고도 했는데 그러다보면 연산군이 주인공이 되버리더라. 김강우에게 연산이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길게 한 번 잡아보겠다고도 했는데 결국 못 썼다. 결국은 돼지들의 왕이 된다는 것을 놓고 그냥 끝까지 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단희 역의 임지연, 설중매 역의 이유영, 전작들에서 노출 연기를 해봤다지만 동성 베드신도 있고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고민이 많았다. 역할들이 강렬하기에 배우들이 주눅 들어 있는 걸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숙제였다. 그래서 모든 콘티들을 미리 다 보여줬다. 이 장면들이 왜 필요하고, 어떤 감정일지, 배우들이 할 수 있을지, 이 장면을 찍고도 계속 배우를 할 수 있을까, 정당성을 주려 했다. 그래서 상의하며 계속 콘티들을 배제하는 작업을 택했다.
난 불안감이 자신의 힘이라고 믿는다. 배우들이 노출 연기를 한다는 게 본인의 두려움일지, 이식된 두려움일지, 그것을 묻는 일부터 시작했다.
노출로 화제가 될지 모르지만 연기를 잘하면 결국 연기로 기억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임지연은 더욱 연기로 승부를 보자고 했다. 못해도 좋으니 유니크하게 하자고 했다. 이유영은 장면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 두 배우들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도 임지연과 이유영의 동성 베드신은 한국영화에선 다시 쉽게 볼 수 없을 장면일텐데. 그 장면에 대한 설계, 촬영, 배우들과의 호흡, 모두 어려웠을텐데.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은 총 4막으로 구성됐다. 설중매가 단희를 공격하고, 단희가 반격을 하고, 두 사람이 정사가 아닌 결투처럼 이어지고, 문진(영화 속에선 남성성기를 닮은 자위기구)으로 승부를 보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에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연대를 하는 식으로 짰다.
드라마의 맥락이 드러나야 저렇게까지 해서 살아남고, 저렇게까지 해서 단죄하고, 저렇게까지 권력이 사람을 괴롭힐 수 있구나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김강우 리액션을 먼저 찍었다.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내가 상황을 설명하면 김강우가 그에 맞춰 울다가 웃다가 그림그리다 쓰려지는 연기를 했다.
원래는 결승전 연회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승부로 펼쳐지는 것으로 구상했다가 배우들을 배려해 인원을 최소화했다.
그 장면을 콘티대로 찍었다면 일주일을 찍어야 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시간은 이틀 뿐이었다. 그래서 롱테이크로 반복해서 이틀 동안 찍었다. 촬영장의 공기는 엄청났다. 배우들이 실제로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찍었다. 컷을 외치면 배우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스태프들이 옷을 덮어준 뒤 좀 있다가 깨워서 다시 찍었다. 8분 가량 롱테이크였다. 현장에선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과연 이걸 영화에 담을 수 있을까란 공기가 팽팽했다.
그 에너지를 담기에는 아직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한 것 같다. 상업적으로 보여줘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롱테이크로 못 담고 쪼개서 담았다. 양날의 검이었던 것 같다. 신선함과 안전장치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에게도 있었다.
-판소리 내레이션이 과연 이 영화에 필요했을까 싶기도 한데. 판소리라면 해학과 어울릴텐데 오히려 판소리 뒤에 더욱 잔인해지는데.
▶프랑스 버전에는 판소리가 없다. 글쎄 풍자와 조롱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광기를 판소리를 통해 카니발로 그리고 싶었다.
-욕망의 카니발이란 점에서 틴토 브라스 감독의 1979년작 '칼리큘라'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선정성을 택하는 순간 '칼리큘라'와 맞닿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어이없음을 카니발로 보여준 작품이니깐. 그래서 칼리귤라적 카니발을 그리려면 판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작들은 빛으로 감정을 짙게 표현했다면 '간신'에선 시종 어두운데.
▶성인사극으로 호불호 논쟁에 뛰어드는 영화를 만든다면 팬시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사극을 만든 감독으로서 실제 역사와 차이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을텐데. 임숭재는 영화와 달리 연산군이 쫓겨나기 1년전에 병으로 죽기도 했고.
▶그렇더라. 원래 시나리오 초고는 임숭재의 아버지 임사홍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임숭재를 그런 이야기로 만들어가면서 좀 더 자유로워지더라.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