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성희 감독(37)은 2012년 665만명을 동원한 '늑대소년'으로 혜성처럼 영화계에 나타났다.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해 CG업체와 애니메이션 회사를 다니다가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판타지 멜로 '늑대소년'으로 단숨에 무서운 신인 자리를 꿰찼다.
그가 차기작 '탐정 홍길동'을 결정했을 때, 그래서 영화계는 주목했다. 소포모어 징크스(2년차 징크스)에 빠질지, 아니면 가능성이 만개할지, 관심이 쏠렸다. 뚜껑을 연 '탐정 홍길동'은 기대 이상이었다. 5월4일 개봉하는 '탐정 홍길동'은 기억을 잃은 탐정 홍길동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쫓다가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려는 거대 조직 광은회 실체를 알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린 영화. 조성희 감독은 '탐정 홍길동'을 할리우드 고전 하드보일드 영화와 '씬시티' 등 프랭크 밀러 영화들처럼 만들었다. 어둡고 짙은 반영웅의 세계에 그래픽 노블 같은 화면은, 조성희 감독만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지만 2년차 감독으로 확실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늑대소년' 이후 차기작으로 일명 우주 프로젝트인 SF영화를 준비했었는데. 그러다가 왜 '탐정 홍길동'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우주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규모가 크고 준비할 게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그걸 준비하다가 안되서 '탐정 홍길동'으로 방향을 틀었다기보단 여러 진행 과정에 있던 작품들이다.
-'탐정 홍길동'은 어떻게 구상했나.
▶사소한 발상이었다. 개성 있는 한국적인 영웅을 만들어보자, 란 생각이었다. 반영웅이었으면 했고, 미국 하드보일드 탐정 스타일이었으면 했다. '씬시티'나 '말타의 매' 등 여러 영화들을 참조해서 밤과 그림자, 어둠을 담아내는 영화였으면 했다. 고독한 듯 읊조리는 내레이션, 팜므파탈, 이런 것들을 한국식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왜 홍길동이었나.
▶반영웅 캐릭터를 만들려 했는데 미국 슈퍼히어로물처럼 원작 만화도 없는데 너무 느닷없이 등장하면 관객들이 낯설어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 픽션 중에서 찾다가 홍길동을 착안했다. 의적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아버지와의 갈등도 있고. 무엇보다 홍길동은 이름의 대명사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유령 같은 익명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늑대소년'은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전쟁병기로 만들어진 늑대소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설정만 그랬지 시공간은 판타지였다. '탐정 홍길동'도 1980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판타지스런 공간이다. 이런 세계는 조성희 월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두 작품을 했지만 이야기 자체가 그리 사실적이진 않다. 대사와 캐릭터, 이야기, 연출, 동선 등등이 다분히 연극적이다. 과장됐고, 허황된 이야기다. 그건 이야기들을 믿음직스럽게 하려면 표현도 따라서 과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에 어울리는 표현방식을 같이 고민하다 보니 그런 판타지스런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야 관객들도 상상의 여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예쁘고 정제되고 가공된 공간이 취향이기도 하다.
-홍길동이 소속된 활빈당의 대표인 황 회장 역에 고아라를 택했다. 하드보일드 영화에 팜므파탈 같은 이미지로 활용되는데. 고전 영화들 속에서 팜므파탈은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역할인데 비해 '탐정 홍길동'에선 고아라는 007영화의 M 같은 역할을 맡았다. 그게 이 영화에 적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역할을 다른 식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유혹도 있었을 텐데.
▶고아라가 맡은 황 회장은 이 이야기 속에서 홍길동을 지원하고 뒤에서 도와주고 잔소리하는 역할이다. 금발 머리 팜므파탈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건 맞다. 그런데 이 역할을 더 깊숙이 활용하면 이 이야기에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고아라도 그렇고, 같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런 생각에 동의해줬다.
-홍길동 역의 이제훈과 고아라는 사실 하드 보일드와 거리가 먼 이미지들이다. 어리고 예쁘고 잘생겼다. 그래서 이질감을 주는데 그게 또 '탐정 홍길동'과는 어울리는데.
▶이야기가 과장돼 있기에 어리고 젊고 상큼한 배우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제훈과 고아라, 그리고 악역인 김성훈은 원래 팬이었고 언젠가 작업을 꼭 같이 해보고 싶었다. 이제훈은 '파수꾼' 윤성현 감독과 아카데미 동기라 그 영화를 수십 번 봤다. 대사에도 있지만 이제훈은 깊은 우물이 있는 배우다. 일견 보이는 이미지보다 많은 것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연 이제훈이 이 홍길동을 어떻게 해줄지 궁금했다. 매번 촬영장에 갈 때마다 뭘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서 홍길동은 싸움도 못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도 아니다. 속으로 사람들을 비웃고. 자칫 비호감으로 보일 수 있는 역할인데 이걸 어떻게 매력 있게 만들어줄지 기대가 컸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이질감은? 등장인물에 몰입시키기 보단 거리를 두는데.
▶이질감, 몰입감, 거리감은 이야기 자체에서 주는 것 같다. 만듦새도 그렇고. 이야기 속 갈등에 완전히 빠져서 가는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이 이상심리가 있고, 스토리도 완전히 땅에 발을 디딘 게 아니라 반쯤 떠 있다. 그러다 보니 거리감을 준다.
-'탐정 홍길동'은 배트맨 같은 반영웅의 탄생 설화이며, 동시에 영웅이 각성하는 이야기고, 거대 조직의 실체와 부딪히는 이야기인데. 짧은 시간 안에 그 이야기들을 잘 녹여냈는데.
▶그래서 시나리오를 상당히 오래 썼다. 그리스 비극이나 배트맨 같은 영웅의 탄생 이야기에서 전형성을 가져 왔다. 탄생과 출발의 의미도 넣고, 악당도 물리쳐야 했으며, 홍길동이 자기 자신도 찾아야 했고, 복수의 고리도 깨야 했다. 이 이야기들이 조화롭게 하려 애썼다.
-아역을 맡은 노정의와 김하나가 인상 깊었다. 특히 김하나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었던 영화 전반부 웃음을 책임지다시피 하는데. 디렉션이 쉽지 않았을텐데.
▶김하나는 아역 에이전시에서 수많은 사진들을 보다가 마음에 딱 들어서 오디션을 봤다. 연기 훈련이 안 돼 있어서 처음엔 힘들었었다. 고민하다가 위험해도 같이 가자고 결정했다. 한 두 달 정도 매일 보면서 연습했다. 나를 똑같이 따라해 달라고 주문했다. 테이크도 많이 갔고, 편집과 후시녹음으로 호흡을 정리했다. 연기 훈련이 안 돼 있기에 자기만의 개성이 분명해서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신파는 느와르 풍 영화로선 삼천포 같은 느낌도 있는데. 한국 상업영화로서 강박 같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홍길동에게 긍정적인 거듭남이 필요했기에 그렇게 정리했다.
-할리우드 느와르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탐정 홍길동'은 시골이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광활한 야외를 마치 서부극처럼 활용했는데.
▶이 영화는 실내와 밤 장면이 많다. 그래서 관객이 자칫 답답할 수 있다. 때문에 낮에 야외 촬영을 나왔을 때는 가급적이면 펼쳐서 활용하려 했다. 그래야 영화 속에서 공간적으로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밀의 공간을 좋아하나. '늑대소년'도 그렇고 '탐정 홍길동'도 그렇고. 비밀의 공간이 주요 포인트로 등장하는데.
▶글쎄. 하다보니 그렇다. 워낙 성격이 폐쇄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비주얼은 '씬시티' 같고 분위기는 하드보일드인데 음악은 전혀 다르게 사용했는데.
▶'탐정 홍길동'은 음악에 많은 빚을 진 영화다. 하드보일드 영화들처럼 빅 밴드 연주나 재즈를 구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음악까지 그렇게 가면 너무 스타일에 경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음악감독님에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어두운 분위기를 음악으로 펼치려 했다.
-영화 속에서 악의 조직 광은회가 꾸미는 음모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연상시키는데. 1980년이라는 설정도 그렇고.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다. 광은회 실체가 드러나도 아니라고 반박한 것에서 하나회를 연상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다. 허구이고 위악에 관한 이야기니깐.
-극 중 "너무 자유로워서 실수를 한다"는 대사가 있다. 무척 인상적이던데. 악의 조직의 이념을 대변한다고나 할까.
▶광은회는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 세상을 구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김성균으로 대표되는 광은회가 신념이 가득하다면 홍길동은 반대로 신념이 없다. 그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픽 노블처럼 영화가 색 설계가 치밀한데.
▶오렌지, 엘로우 등 난색(따뜻한 색)과 블루 등 한색(차가운색)을 대비시켰다. 여관, 서점, 중국집 등 착한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은 난색으로, 나쁜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은 한색으로 만들었다. 소품 하나하나까지 색칠을 했다. 홍길동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다가 마지막에 갈색 코트로 갈아 입도록 했다. 영화 속 변화와 의상 색이 따라가도록 했다.
-한국영화에 없던 비주얼이다보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만드는 사람들이 관객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선보이는 게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더 서비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정 홍길동' 2탄을 암시하던데. 기획 중인가.
▶1편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아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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