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감독이 돌아왔다. '죽여주는 여자'를 내놨다. 성매매하는 노인 이야기다. 죽여주게 잘한다는 소문이 난 박카스 할머니가 실제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죽여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윤여정이 주연을 맡았다. 이재용 감독은 전작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강동원과 송혜교, 두 아름다운 배우들과 죽어가는 아이 이야기를 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정공법이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 성매매, 죽음, 코피노,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사회의 그늘을 정직하게 다뤘다. 따뜻하게 다뤘다. 영화 속에는 조계사로 피신했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이재용 감독은 "우연이지만 필연"이라고 했다. '죽여주는 여자'가 먼 훗날 돌이켜봤을 때 2015년의 어떤 풍경을 담아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재용 감독이 이런 소재를 다뤘기에 '죽여주는 여자'는 좀 더 발랄할 줄 알았는데 정공법으로 찍었는데.
▶그래도 많이 타협했다. 어두울 수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불편하고 어둡게 그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웃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도록 그런 지점을 담으려 했다. 뭐 뒤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건, 이야기 성격상 어쩔 수 없지만. 내 스타일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왜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나.
▶애초에 노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귀향'이란 제목으로 금강산을 넘어서 북에 있는 고향까지 걸어가는 노인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쓴 적이 있다. 윤여정 선생을 주인공으로 나이 든 여배우 이야기를 써본 적도 있고. 우리 부모님을 봐도 그렇고, 윤여정 선생을 봐도 그렇고, 나 스스로의 변화를 봐도 그렇고, 노인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문 기사로 노인 성매매 이야기를 접했다. 윤여정 선생이 떠올랐다. 그 분이라면 내가 그리려는 이야기에 적합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야기 구상과 캐스팅이 동시에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이 역할을 하는 걸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는 노인 성매매 뿐 아니라 코피노, 트랜스젠더,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윤여정 주변 인물들인데.
▶그녀도 누군가와 같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물들을 내가 관심 있었던 주변부 사람이었으면 했다.
-촬영기법도 아주 정공법이다. 카메라 구도도 정공법이고. 이야기와 연출의 톤앤매너가 일치하던데.
▶이런 이야기인 만큼 될 수 있으면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또 한가지는 이 영화가 원래 영진위에서 3D영화 제작 지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스태프도 늘었고, 카메라도 3D용이었다. 3D로 찍어야 했기에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정공법적인 촬영이기도 했다. 물론 이 이야기와 이런 방법이 맞았기도 했지만. '죽여주는 여자'는 2D로도 충분히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그래도 3D로도 개봉해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왜 제목을 '죽여주는 여자'로 정했나.
▶이 이야기를 윤여정 선생에게 몇 줄로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노인 성매매 이야기인데, 서비스를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가 실제로 사람들을 죽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이 제목을 떠올리게 됐다. 처음에는 너무 가벼운 제목 아닐까라고 싶었지만 결국은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계속 죽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결말로 막을 내리는데.
▶장르영화고 오락영화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처음 콘셉트는 그렇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디까지 가야 할까, 그 지점을 고민했다. 나를 빗대서 내가 늙어서 어떤 상황이 됐을 때 죽고 싶을까를 생각해봤다. 풍을 맞아 혼자서 거동도 못하는 상태. 치매에 걸려서 스스로를 잊어가는 상태. 가족을 모두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상태. 영화 속 세 죽음을 나 스스로에 대입해봤다. 의도한 건 아닌데 실제로 노인 자살 이유 중에서 이 세 가지 유형이 가장 많다고 하더라.
-전작 '두근두근 내 인생'은 봄과 여름, 삶이 빛나는 계절을 담았다. 그런데 '죽여주는 여자'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을 담았다. 색감의 차이와 의도가 느껴지던데.
▶실제로 '죽여주는 여자'는 늦여름에서 초겨울까지 촬영했다. 그 시간대를 선택한 건 감독의 의도다. 2개월 준비하고 2개월 찍고 5일만에 편집해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보냈다. 그리고 다시 후반작업을 했고. 그 시간대가 의미하는 바가 영화의 의도와 맞았기에 그랬다.
-영화 속에서 필리핀 여인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 도망쳐온 의사를 가리켜 "한국 남자새끼들은 다 똑같지"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 대사는 '죽여주는 여자'의 또 다른 주제 같기도 한데. 죽고 싶어하는 친구를 자기가 아닌 이 여자에게 대신 죽여달라고 하는 것이랄지, 무책임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어떤 질타도 느껴지던데.
▶윤여정 선생이 맡은 이 여자는 6.25 전쟁 직전에 태어나 전쟁고아로 자라서 생존하기 위해 떠밀려 온 인생을 산 사람이다. 공장에서도 일해봤고, 파출부도 해봤지만 돈 더 준다고 해서 동두촌에 가서 양공주가 됐다가 흘러흘러 살아온 삶이다. 그녀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국제시장'의 영웅적인 남성의 삶과는 또 다른 모습.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성들이 만들어낸 한국 현대사의 어둠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여인의 삶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그 비극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한 여인의 삶. 요즘 여권이 높아졌네 어쩌네 하지만 여전히 유리천장은 높고, 남자 다음이 여자다. 그런 것들을, 그런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자들을, 그녀는 살아있다고 느껴지게 하는 여자다. 그리고 고통을 끝내주는 여자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갖고 있는 여인.
-그래서일지, 윤여정 선생이 맡은 역은 마치 관음보살 같다. 모든 아픔을 보담는다고 할까. 영화 속에서 조계사를 찾는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고.
▶그렇다. 그녀는 기쁘게 해주고 고통에서 구해주는 여자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감내해 왔던 부분이다.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죽여주는 여자'를 한자로 '선녀관음'으로 번역했더라. 그쪽에선 관음보살이 창녀들의 신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영화 속 그녀는 스스로 자비행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런 역할을 했다. 우연히 조계사 장면에는 배경에 관음상이 찍히기도 했다. 우연이 필연이다.
-'죽여주는 여자'에는 조계사 앞에서 한상균 위원장과 관련된 일인 시위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 속 뉴스 장면에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는 모습도 소개되고.
▶다시 말하자면 우연이 필연이다. 내 삶에 우연과 필연이 많다. 그러다보니 그런 우연과 필연을 담는 게 영화 만드는 묘미 중 하나다. 마침 조계사 장면을 하루만 찍을 수 있었는데 그 때 상황이 그랬다. 그냥 찍었다. 또 영화 속에서 이 여성에게 흘러간 시간을 계산하면 그 때가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때 화제가 된 뉴스를 모아봤는데 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게 가장 큰 이슈였다. 그래서 담자고 했다. 먼 훗날 이 영화가 2015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박카스 할머니가 있고, 버려진 코피노 문제가 있고, 저런 사건들이 핫 이슈였다는 걸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영진위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그 장면들과 관련한 간섭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영화 속 트랜스젠더 역할을 실제 트랜스젠더인 안아주에게 맡겼는데. 연기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맡기는 건 모험이었을텐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 트랜스젠더를 쓰는 걸 반대했었다. 난 여자를 그 역할에 쓰는 건 100% 반대했다. 사실 같지 않으니깐. 그렇다고 남자에게 맡겨봤더니 안되겠더라.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에 대해 갖고 있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과 선입견들을 담아서 연기하더라. 그건 걸 안 하려고 한 건데 그런 모습들로 연기하니 난감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가 있을지 수소문을 했다. 다행히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삶이 영화 속 삶과 닮았다. 20대에 트랜스젠더바 새끼마담으로 시작해 돈을 많이 벌었다가 남자 잘못 만나 다 날리고 일본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돌아서 다시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고. 이것도 인연인 것 같았다. 영화 속 댄스장면도 그녀가 다 고안했다. 자기 후배들을 섭외해 백댄서로 세웠고. 연기는 문외한이지만 실제 그녀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주길 원했다. 배우인 윤여정 선생은 "그게 제일 어렵다"고 타박하긴 했지만.
-안아주를 그녀라고 정확하게 지칭하는데.
▶그녀죠. 그녀다. 스태프 중 하나가 안아주에게 "아주 형"이라고 자꾸 불렀다. 그래서 따로 불러서 혼을 낸 적이 있다.
-윤여정이 성병에 걸려서 병원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인 것이지만 베드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려 한 이유도 있나.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 나이에 성병이 걸렸다는 게 이 여인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베드신을 보여줄까 생각을 안한 것도 아니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유사 성행위가 나온다. 그 중에는 윤여정의 상대로 노인 성매매하는 사람들을 다큐멘터리로 찍으려는 청년도 나오는데. 감독이 직접 개입한 듯한 느낌이던데.
▶이 여인의 전사를 소개시켜 줄 필요가 있긴 했다. 그러는 한편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를 희화화한 것도 있다. 왜 극 중 대사로 윤여정 선생이 "이런 것 찍지 말고 돈 되는 거 하라"로 하지 않나.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좋냐"고. 소재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낮 영화거리로 좀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영화감독이 과연 영화로 만들어도 될까란 죄책감.
-다음 영화는? 사랑 이야기인가?
▶본격 상업영화를 할 생각이다. 사랑 이야기는 아니고. 그런데 하다보면 나한테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뛰어든다. '죽여주는 여자'도 그랬고. 아 한 가지 확실한 건 2019년 '여배우들2'를 만들 생각이다. '여배우'들 속 여배우들이 10년이 지난 뒤의 모습을 담는다는 기획이다. 이미숙 환갑 잔치에 이 여배우들이 모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배우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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