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우 감독이 돌아왔다. 28일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어떤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영화에는 정지우 감독이 깊게 새겨있다. 긴장되는 멜로. '은교'와 '4등'과 '침묵', 정지우 감독의 2기 작품들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데 또 다르다. 정지우 감독은 더 나아가려 하는 것 같다.이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많이 포함합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왜 했나. 원래 준비했던 작품이 아니었는데.
▶제안을 받고 초고를 봤는데 이런 영화가 나와서 관객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처음에는 음악 비용 등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못 해서 작은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김재중 무비락 대표가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됐다. 방향에 대해 기꺼이 동의해주면서 같이 하게 됐다.
-원래 초고는 미수(김고은)가 현우(정해인) 대신 출판사 사장 종우(박해준)를 택하는 것 같은 결말이었는데. 지금의 결말로 바꾼 까닭은. 상업적으로는 지금 엔딩이 좋지만 미수가 노트북으로 보이는 라디오를 보는 장면으로 끝나는 게 더 여운이 있을 수도 있는데.
▶자칫 돈 때문에 그렇게 선택한다고 호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수의 속마음은 이래, 이렇게 미뤄 짐작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내 그릇은 거기까지인 것 같다.
-현우(정해인)의 얼굴을 참 말갛게 그렸다.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듯 잘생겨서 용서받는 듯한 논리상의 허점이 있는데.
▶논리상의 허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영화를 텍스트라고 하면 인과에 문제가 있지 않냐는 것인데, 그건 얼굴로 메운다기보다 진심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현우가 진심을 다해 대답하는 순간 은자(김국희)가 "그래, 그러던가"라고 말한다. 진심에는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또 친구들과의 관계는,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다 같이 열심히 놀던 친구들이 대학교에 다 떨어졌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어찌어찌 대학에 붙었다. 그러면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배신감이 들기 마련이다. 배우들에게 현우와 친구들의 관계를 그렇게 설명했다.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게 아니라고.
-현우가 죄책감을 느끼는 그 사고는 학교 폭력인지, 친구들과 놀다가 실수로 떨어진 것인지, 현우가 민 것인지, 정확하게 묘사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생긴 긴장감이 영화 곳곳에 불안함으로 밀도를 높이는데. '침묵'의 영향인가.
▶음. '침묵'의 영향도 있겠지만 '4등'의 영향이 더 크다. 직접적으로 폭력의 순간을 그리면 클리셰(구태의연한 영화적인 장치)가 동원될 수 밖에 없다.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도 그리고 싶지 않았다. 누명을 쓴 주인공 서사는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현우가 억울하다는 것을 그리려면 떨어지는 친구를 붙잡고 있다가 놓치는 장면을 넣어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우와 친구들이 죽은 친구의 누나를 찾아가자 그 누나가 "알아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실수라 하더라도 그 친구의 죽음은 현우와 그 친구들의 인생을 바꿨다. 그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서스펜스를 주려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런 관계를 보여주려 하다 보니 긴장감이 생긴 것이다.
또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사고를 구체화하면 이 영화가 너무 과거의 서사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은자가 하는 대사(믿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의 울림도 그렇고. 오해를 피할 수 없다는 현우의 두려움도 그 사건이 구체화되면 상상의 여지가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현우의 친구들은 현우만 제외하고 거칠다. 그 거침에서 오는 서스펜스가 있는데. 미수가 그 친구들을 만날 때, 현우가 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오는 긴장감이 있는데.
▶다들 입이 걸다. 기질이 다른 배우들을 일부러 한 데 모았다. 그렇게 오는 불안한 기운을 담고 싶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친절하게 다 설명하는 최근 영화들과 달리 의도적인 생략이 많다. 왜 미수는 현우의 과거를 묻지 않는지, 현우의 과거를 왜 구체화하지 않았는지, 각자의 지난 시간들이 많이 비어있다. 이 비어있는 부분이 매력이기도 한데.
▶대중영화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생략을 통해 여백이 운영되는 면이 낯설 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익숙함(장르적인 장치)이 있기에 예상되고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 이 영화에 전체적인 여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여백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그날 밤, 그 다음날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대중영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게)무리한 바람이란 점이라고 인정한다. 그래도 이 영화를 먼저 본 지인들이 "문득 다시 생각난다"는 덕담을 해주더라. 덕담만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이유는 음악과 함께 그런 부분에 대한 호기심과 미뤄 생각해보는 기회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제발 그런 방식으로 (관객들에게)작동됐으면 좋겠다. 그 여백을 채우는 과정이 영화를 완성하는 관람자로서 마무리가 되면 얼마나 멋있는 일일까요?
-음악과 사진, 어느 것에 더 꽂혔나.
▶둘 다 꽂혔다. '이 한장의 사진'이란 책이 있다. 한장에 사진에 얽힌 사연들을 담은 책이다. 이제는 사진이 다른 방식으로 소모된다. 모습은 똑같은데 용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사진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뺏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사진으로 담고, 그 위에 음악이 흘렀으면 했다.
-왜 90년대 중반이었나. 정지우 감독이 청춘을 보낸 시대는 아닌데.
▶90년대 중반은 어떤 꼭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문화적으로 거품이 사라져가는 시대. 그런 시대가 문화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 음반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음악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초고를 쓴 이숙연 작가가 그 연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지는 걸 반복하는 주인공들에게 그 시기가 가장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연락처가 없으면 못 만났던 세대. '읽씹'이 없었던 시대의 청춘이기에 커브처럼 사연에 격동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현우와 미수가 처음에 손만 잡고 자는 감성도 마찬가지인가.
▶손을 잡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던 시대가 있었구나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키스가 아닌 뽀뽀도 마찬가지다. 뽀뽀지만 마치 뜨거운 것에 닿은 것 같이 느꼈던 시대. 그런 순간들이 있었고 나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현우와 미수, 남녀의 시점이 오가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의 시점으로 그려지는데. 여느 남성 첫 사랑 영화와 크게 다른데.
▶초고가 여자가 쓴 여자의 첫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여성 시점으로 중심을 잘 잡으면서 이끌려 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과거는 파스텔풍인데, 그 뒤는 어두운 톤으로 불안감을 주다가 현재로 오면서 색이 분명해지는데.
▶파스텔풍인 건 정해인과 김고은, 둘이 정말 예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촬영감독과 많이 고민해서 결정한 게 이 영화는 몇몇 컷을 제외하곤 끝까지 같은 렌즈로 찍었다. 예컨대 표준이 50밀리 렌즈라면 이 영화는 내내 35밀리, 40밀리 렌즈로 찍었다. 장면에 따라 렌즈를 바꾸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불편했지만 동일한 렌즈로 둘의 감정 변화를 계속 담고 싶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가 조금 더 현대적인 컬러다. 그전은 시대극 같은 색을 담으려 했다. 각 시기마다 컬러를 덩어리처럼 잘게 잘게 나누려고도 했다. 그러다가 DI 작업(후반 색작업) 때 그랬다간 너무 시대를 앞세우는 것 같아서 좀 더 색을 두텁고 뭉툭하게 했다.
-제한된 렌즈로 그렇게 담을 수 있었던 건, 정해인과 김고은이 화면을 가득 채워서 그렇기도 한데.
▶그렇다. 두 배우의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의 순간이 담겨서 화면을 채운 것 같다.
-둘의 키스신이 베드신 같은데. 15분간 길게 찍었는데 어떤 동선이나 구체적인 액션을 주문하지 않았다던데. 그저 배우들이 준비되면 촬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그 장면은 배우들의 감정이 충분히 올라왔어야 됐을텐데 촬영 시점은 언제쯤이었나.
▶중간쯤이었다. 세트에서 찍었다. 시간이 짧게 걸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런 신은 그 신만 찍기 마련이라 배우들의 감정을 기다릴 수 있었다. 구체적인 동작이나 방식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한 번 잡는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처럼 두 사람에게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넘어가는 만큼 얼마나 떨리고 숨이 막힐지 보여줬으면 했다. 모니터를 보면서 두 배우의 호흡과 내 호흡이 비슷해지는 순간까지 찍었다. 숨이 차지는 순간에서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고,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컷을 했다. 그게 15분이 걸린 것 같다.
-그렇게 배우의 감정을 유지하면서 찍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법일텐데. 초반부 비 오는 걸 둘이 지켜보는 장면도 그렇게 찍었나.
▶어마어마하게 찍었다. 숙제가 있는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세하게 교감이 시작되는지를 보여주고 관객이 받아들여야 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두 배우가 정말 잘 해줬다.
-많은 노래들이 사용됐는데. 감독에게 가장 쾌감을 준 노래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제일 쾌감이 컸다. 콜드플레이의 '픽스 유'는 어떤 반응이 예상되는 노래지만 핑클은 정말 둘의 감정과 관객이 감정이 딱 맞아떨어지면서 나오는 반응이라 쾌감이 컸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많은 노래들이 사용됐지만 반면 메인 테마가 없다. 두 사람만의 키워드 같은 메인 테마가 있었다면 기술적으로 더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수월했을텐데.
▶이 영화에서 메인 테마가 없는 것이 굉장히 어려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메인 테마가 있으면 시작할 때 들려주고, 클라이맥스에서 변주되고, 엔딩에서 다시 재현되는 구조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조가 영화에 대단히 안정적인 정서를 줬을 것이다. 그런 구조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런데 영화 시작과 중간, 끝을 맞이하는 과정은 영화 속 두 사람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과 물려 있다. 각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두 사람이 재회할 수 있었고 깊은 만남이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메인 테마가 있어서 반복되고 변주된다면 회고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반영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을 보면 어렵고 손해가 나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도 그 시기에 들려줄 수 있는 거기에 걸맞는 음악이 각각 나오는 방식의 구조가 여전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미수를 맡은 김고은의 성장이 놀랍던데. 웃어도 눈으로 울고, 울어도 눈으로 웃던데. 감정 표현의 영역이 한층 넓고 깊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하지란 기분이 드는 순간들이 많았다. 예컨대 은자의 수제비집을 현우랑 같이 찾아갔을 때 "왜 그렇게 살아"라고 속이 상하면서도 현우에게 "수제비 맛있지"라고 말할 때의 표정.
김고은은 여느 청춘들처럼 온전한 20대를 걸은 것 같다. 남다른 20대를 보냈지만 온전히 꽃길이 아닌. 여느 청춘들처럼 앞뒤가 퉁퉁 부딪히면서 보낸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담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20대를 보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이 너무 궁금한 배우다.
-정해인은 연기를 너무 잘했다기보다 현우와 너무 닿아있다는 느낌이던데. 그래서 이해가 되는 감정들이 전달되던데.
▶정해인은 이 사람을 계속 다시 보게 된다. 현우의 마음 태도와 자연인 정해인의 진심이 맞닿아 있는 게 분명히 있다. 정해인은 쇼잉이 아니다. 진짜로 그런 게 느껴진다. 그러기가 결코 쉽지 않다. 영화 속에서 현우가 "난 정말 소중한 거 한두개면 되는데"라고 말한다. 한 끗만 삐끗하면 거짓이 되기 쉬운데 정해인은 그게 진심이라고 느껴지게 한다. 그건 자연인 정해인이 그렇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관전의 맛이 있는 배우다.
-정해인이 박해준이 탄 차를 쫓는 장면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달린 것 같던데. 정해인은 멋지게 달리는 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고, 그게 이 영화에 굉장히 절절하게 담긴 것 같은데.
▶진짜 (정해인이)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촬영장소가 레커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카누와 육상을 하는 선수들을 수십명 불렀다. 2인 1조가 돼 카메라를 들고 뛰도록 했다. 보통 그런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뛰는 속도에 맞춰서 배우에게 달려달라고 하는데, 정해인에겐 죽을 힘을 다해 뛰면 그 속도에 카메라를 맞추겠다고 했다. 언덕까지 죽을 힘을 다해 정해인이 뛰면 앞서서 2인1조로 선수들이 카메라를 들고 뛰다가 교대했다. 그렇게 수십명의 운동선수들과 정해인이 같이 뛰었다.
-김고은이 그 뒤 차에서 내려서 하는 대사 "뛰지마. 다쳐"는 정말 많은 뜻을 내포한 것인데. 원래 대사에서 더 줄였다던데.
▶원래는 "뛰지마. 다쳐. 자존심 상해"였다. 끝까지 내가 지키고 싶은 대사는 "자존심 상해"였다.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저 사람에게 네가 계속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고은이 "자존심 상해"라는 대사를 못하겠다고 하더라. 내게는 제일 소중한 대사지만 그걸 표현하는 배우는 그 대사는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대로 존중했다.
-현우가 유리가 있는 천정에 미수 사진을 붙여 놓았는데. 그 유리를 통해 눈부신 햇살이 투과되고.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선 그런 유리가 있는 천장을 구현해야 했을텐데.
▶역으로 공간이 먼저였다. 김영사에서 촬영 허가를 해준다는 소리를 듣고 먼저 찾아갔다. 갔더니 그 유리로 된 지붕이 있더라. 그 지붕을 보고 저기에 사진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수의 빵집과 현우와 미수의 자취방은 로케이션을 어떻게 했나.
▶빵집은 인천 화수동이고 둘의 자취방은 종로구 창신동이다. 제일 공간의 키로 생각한 건 골목이었다. 골목을 통해서 오가고 우연히 만나는 과정의 느낌을 찾아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우연히 만난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두 곳은 골목의 위아래에 위치하고 이 골목 저 골목이 연결돼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취방으로 가고 빵집으로 오는 맵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두 공간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90년대를 담은 의상, 헤어, 미술, 소품들이 인상적인데.
▶의상, 헤어, 미술, 소품들 등 시대를 고증하는 영화의 백그라운드 요소는 스태프를 믿을 수 밖에 없다. 구체적인 지정은 하지 않았고 리서치를 통해서 여러 이미지 자료를 전체적으로 공유하면서 그 시기 포인트들을 드러내려 했다. 다만 표면적으로 그 포인트가 노골적으로 튀어나오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건 내 기질의 문제인 것 같다.
-이숙연 작가가 '유열의 음악앨범' 작가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는 라디오가 여러가지 요소로 활용된다. 수미쌍관으로 담기는데 들리는 라디오에서 보이는 라디오로 바뀐다.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라디오에서 보이는 라디오로 변화를 담고 싶었나.
▶라디오가 수미쌍관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전체적인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봐야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 노래가사, 라디오 디제이 멘트가 넘나드는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한다. 그렇게 라디오가 계속 흐르고 있다.
재밌는 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신청곡을 요청한 사람이 그 음악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어떤 음악이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다. 음악을 문뜩 우연히 만나게 된다. 우연과 문득 흘러나오는 음악이 이 영화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라디오가 잘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라디오가 영화의 마지막이 된다는 것이 시대가 그만큼 바뀌었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이는 라디오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지는 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나도 궁금하다. 전통적으로 라디오는 소리가 더 소중하다고 이 영화가 주장했다면 보이는 라디오는 더 얇아지고 즉각적인 기분에 해당한다. 보이는 라디오를 마지막으로 어떤 의지를 갖고 달려온 사람이 만나게 한 데는 긴장과 약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둘의 이후 관계가 넉근히 행복한 결론일 뿐일까란 물음표를 준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둘이 전화 통화하는 장면이 없는데.
▶두 사람이 전화하는 장면이 시대가 바뀌었는데 왜 없을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만약에 영화가 보이는 라디오에서 둘이 마주 선 상태로 끝난 순간 그 이후로 이어진다면 둘이 전화 통화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올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영화가 지금 그 순간에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다면 전화 통화하는 장면이 빈번히 나오는 게 대단히 어울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은자 역을 맡은 김국희는 매우 좋던데.
▶이 영화에는 정해인 김고은을 빼고 모든 역을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김국희는 오디션을 보면서 너무 좋아서 같이 하게 됐는데 알고보니 뮤지컬계에선 매우 유명한 배우더라. 은자는 너무 중요한 역이다. 아무한테도 나쁜 소리를 안한다. 누구나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판타지다. 그 과정이 믿어줘야 하는데 김국희는 그걸 믿어지게 만든다. 정해인에게 가불해줄 때의 그 참담한 표정. 김고은이 끌어안으면서 "이게 뭐야"라고 할 때 "살이야"라고 하는 모습. 또 김고은과 김국희가 도너츠에 소주를 먹을 때, 원래라면 쪼개서 편집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김국희와 김고은이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길게 잡을 수 밖에 없도록 연기했다. 진심으로 좋은 배우다.
-은자는 애 딸린 남자와 결혼했다는 설정이다. 친딸이 아니다. 남편은 잠깐 등장하는데, 마치 매 맞는 아내 같은 불안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더 설명을 안 한 까닭은.
▶멜로 드라마 관점에서 보면 은자가 갖는 비중도 대단히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서브 플롯과 메인 플롯의 경계쯤에 은자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은자가 모두에게 헌신과 사랑과 믿음을 주는 형태로 살고 있는 캐릭터이기에 은자 남편이 등장하는 방식은 대단히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그렇지만 (비중의)가성비가 좋은 정도로 남는 것이 영화에 맞다고 생각한다.
-미수는 왜 (현우의)죽은 친구 누나에게 일부러 찾아갔을까. 그 선택으로 어쩌면 파국이 예정됐는데.
▶무언가 자기가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가 용서해달라고 빌던가, 현우가 한 게 아니라고 하든가. 그렇게 해서 자기가 안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지우 감독 영화에는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곤 하다. 이 영화도 현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부분이 있는데.
▶여자가 남자를 구원한다는 표현에는 이견이 있다. 그런 의도로 만들지는 않았다. 내 무의식에 여자가 남자보다 지혜롭고 더 현명하다는 게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렇다보니 영화 속에 여자를 그런 위치에 자리매김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더 어리석고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남자를 여러 번 그려 왔던 건도 사실이다. 제 스스로 저를 생각하는 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단어는, 주어가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흔쾌히 동의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런 개념을 감당하면서 영화에 녹여낸 건 아니다. 도리어 그 밑에 녹아있는 어떤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지혜로움과 현명함으로 가족을 복원하거나 만들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자, 그런 면은 있는 것 같다.
-'4등'에 출연했던 박해준이 이번에는 능글능글한 출판사 대표로 나왔는데. 여느 멋진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 영화에 잘 맞았던 것 같은데.
▶박해준이 맡은 종우는 어떤 경계에선 분명히 좋은 사람이다.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람이기도 하고. 박해준이 그런 것들을 잘 표현해줬다. 실제로 박해준은 희한하게 웃기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엉성하고 유쾌하다. 그런 점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들었던 이야기 중에는 박해준이 워낙 악역 이미지가 강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라는 것도 있었다. 진짜로 희한하게 웃기고 선량한 사람이다.
-차기작은. 듣기론 노희경 작가와 같이 29금 영화를 만들려는 계획도 있다던데.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무비락 김 대표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고, 노 작가님과 그런 영화를 만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공감은 있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