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news

"학점 3.5 밑이면 쫓아낸다!" 야구는 학업-과외 다음 3순위, '유쾌했던 스승' 이광환 감독은 서울대 야구부에 무얼 남겼나

발행:
수정:
김동윤 기자
故 이광환 감독(노란색 네모)의 생전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과 함께한 단체사진. /사진=전다솜 씨 제공
故 이광환 감독(노란색 네모)의 생전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과 함께한 단체사진. /사진=전다솜 씨 제공

고(故) 이광환 감독의 마지막 제자 서울대학교 야구부 학생들은 스승이 야구에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30일 오전 서울 신월 야구장에서는 한국여자야구연맹이 주최·주관한 '이광환 감독 추모식 및 추모 경기'가 열렸다. 지난달 2일 별세한 이광환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한국여자야구연맹과 서울대 야구부 OB들이 뜻을 모았고 한 달여의 준비 끝에 성사됐다.


이광환 감독은 지난달 2일 지병으로 향년 77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이광환 감독은 1994년 LG 트윈스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끈 명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야구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5인 선발 로테이션과 셋업맨, 마무리 등 투수 분업화를 한국야구에 도입해 패러다임을 바꾼 선구자로도 여겨진다. 2008년을 끝으로 프로야구에서 물러난 뒤로는 한국야구 저변 확대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국여자야구연맹 부회장과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여자야구 발전에 기여했고, 서울대 야구부를 10년간 맡아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야구의 재미와 운동의 가치를 알렸다.


이날 이광환 감독의 유산인 한국 여자 국가대표팀과 서울대 야구부원들이 친선전을 펼친 가운데, 이광환 감독과 10년간 함께 했던 서울대 매니저 전원과 당시 선수들이 일부 모여 자리를 빛냈다. 제자들에게 어떤 스승이었을까.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11학번 전다솜(33) 씨는 야구부 문을 두드리던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한다. 전 씨는 "2011년 신입생으로 입학해 2015년까지 서울대 야구부 매니저로 활동했다. 야구를 좋아해 대학에 가면 야구부 매니저를 하고 싶었다. 들어가니 선수들과 이광환 감독님이 정말 환대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매니저가 한 학번에 한 명꼴로 많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미소 지었다.


故 이광환 감독의 생전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과 함께한 단체사진. /사진=전다솜 씨 제공

당초 가입하려 했던 사회대 야구부 동아리가 마침 문이 닫혀 있기에 들른 서울대 야구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씨는 서울대 야구부가 단순한 친목 동아리가 아닌 대학 리그에 참가하는 팀인 걸 몰랐고, 이광환 감독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이광환 감독이 정말 대단했던 사령탑인 걸 알고 많이 놀랐다고.


이광환 감독은 프로팀 지도자 시절부터 배움과 체계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했던 사령탑이었다. 본인부터 1986년 일본프로야구(NPB) 세이부 라이온즈, 1987년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MLB)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08시즌을 끝으로 야인이 된 이후로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육성위원장을 맡아 서울대학교와 국내 최초 야구 지도자 육성기관인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울대 야구부 감독직을 수락했고, 이곳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조금씩 현실화했다. 서울대 야구부는 이광환 감독 부임 전과 후로 나뉜다. 전 씨는 "감독님이 오시기 전까지 서울대 야구부는 그냥 동아리였다. 하지만 감독님은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고, 매니저들에게도 출석 체크, 회계 관리, 버스 대절 등 역할을 부여했다. 그전까진 주장이 혼자 다 하던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전 씨는 "당시 우리에게는 학업이 항상 1순위였다. 2순위는 과외였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과외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구는 3순위였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님은 학업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우리 매니저들의 일 중 하나가 토요일마다 다음 주에 얼마나 부 활동을 나올 수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4일 이상 출석이 권장됐지만, 수업이 늦게 끝나거나 시험 기간에는 흔쾌히 연습을 안 나와도 된다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故 이광환 감독의 생전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과 함께한 단체사진. /사진=전다솜 씨 제공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이광환 감독은 10년의 재임 기간 중 학생들의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한 적이 있다. 이때 서울대 야구부원들은 야구를 하기 위해선 학점 3.5(4.3 만점)를 넘겨야 했다.


전 씨는 "당시 야구부원 중에 올 A를 맞은 오빠가 있었다. 야구도 정말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어서 다들 천재라고 했다. 제자가 올 A를 받아오니 감독님이 정말 행복해하셨다. 그때 그 오빠가 남긴 유명한 말이 '공부하다 스트레스받으면 야구하고, 야구하다 스트레스받으면 공부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영감을 받은 감독님이 '공부로 스트레스 풀자'면서 '학점 3.5가 안 되면 (야구부) 다 내쫓을 거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쫓겨날 위기의 선수들이 많아서 다들 열심히 했다. 그걸 감독님이 또 다 보셨다. 그 정도로 학업을 항상 중시하셨다"고 떠올렸다.


서울대 야구부는 엘리트 선수들이 진학하는 타 대학 야구부와 달리 일반 학생들이 주류를 이뤄 두 자릿수 참패도 많았다. 1977년 창단 후 2025년 현재까지 단 2승만을 해냈는데, 아쉽게도 이광환 감독 재임 전후의 일이었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음에도 이광환 감독은 야구 실력으로 선수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전 씨는 "우리가 야구를 정말 못했는데 야구 못하는 건 신경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볼넷이나 실책이 나오면 '우리 참 중구난방이다'라는 등 농담을 많이 하셨다. 짜증 나실 법도 한데 그런 티를 거의 안 내시고 가끔 모자만 한 번 벗으셨다. 너무 크게 졌을 때 학교에 가서 훈련한 적은 있다"고 뒷이야기를 밝혔다.


故 이광환 감독(하얀색 모자)의 생전 서울대 야구부 제자들이 제주도로 내려왔을 때 함께했던 단체사진. /사진=전다솜 씨 제공

유쾌한 스승이었으나, 태도와 마음가짐에는 엄격했다. 전 씨는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중시하셨다. 지고 있다고 설렁설렁하는 걸 정말 못 참으셨다. 또 지각 안 하는 걸 가장 강조하셨다. 지각하거나 생활 태도 면에서 불성실한 것에는 많이 혼내셨다"고 전했다.


야구부 매니저들은 졸업 후에도 이광환 감독과 인연을 이어갔다. 야구부원들 역시 '내가 할 일을 최우선으로 한 다음에 야구를 하라'는 감독의 가르침에 따라 현재에도 사회인 야구를 하는 등 일상 속에서 야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전 씨는 "선수들에게는 다소 엄격하셔서 매니저들과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정말 다정한 분이셨다. 제주도에 내려가셔서도 날씨가 좋으면 바다 사진을 보내주시는 등 항상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주셨다. 큰아버지 같으셨고 교수님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인생의 스승님이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솔선수범했던 이광환 감독의 모습은 야구부원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전 씨 기억 속 이광환 감독은 매일 오전 9시에 베이스볼 아카데미에 나와 수업하고 오후 2시면 척박했던 야구부 운동장을 직접 정비했다. 저녁 4~5시에 시작한 훈련은 오후 10시까지 이어졌고, 청백전이 있는 토요일이면 오전 8시에 더 일찍 나와 땅 고르기를 반복했다. 프로 시절 경기 시작 4~5시간 전에 훈련을 준비하던 그 모습은 아무도 보지 않는 서울대 교정에서도 이어졌다.


전 씨는 이광환 감독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정말 야구를 사랑하시고 야구에 헌신하셨던 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故 이광환 감독. /사진=KBO 제공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슬라이드

300만 앞둔 '귀멸의 칼날 : 무한성편' 日 성우 내한
진선규 '시크한 매력'
'13회 부코페 개막합니다'
'살인자 리포트, 믿고 보세요'

인기 급상승

핫이슈

연예

K팝·K 콘텐츠, 위기 혹은 기회?[★창간21]

이슈 보러가기
스포츠

'홍명보호 악재' 황인범 부상, 9월 A매치 불참

이슈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