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 차리지."
아득한 현실을 개탄하던 목소리는 슬픔과 애도를 넘어 분노와 반성으로 변했다. 안타깝게 요절한 고(故)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고 최고은 작가는 지난 1월 29일 경기 안양 석수동의 월세집에서 지병과 생활고로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안겼다. 서른 둘 젊은 예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은 영화계를 넘어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고인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쪽지의 내용은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러니 남는 밥과 김치를 좀 달라"는 고인의 마지막 메시지는 아프다 못해 시렸다.
누군가는 한국의 문화 예술 산업이 젊은이들의 희생을 담보해 자라난 괴물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그녀의 쪽지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고 고고익선의 스펙 경쟁에 뛰어든 20대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영화산업의 부조리한 시스템과 아득한 현실은 한 젊은 예술가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그렇게 수면위로 부상했다.
극심한 취업난과 표류중인 청춘. '88만원 세대'로 명명된 20대는 최 작가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자신들의 슬픈 자화상을 발견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고 이진원씨의 죽음 때 그러했듯이, 젊은이들은 SNS를 통해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분노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을 비롯해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 파인하우스 이준동 대표, 강우석, 이현승, 정용기, 김종관 등 영화감독들과 만화가 강풀, 소설가 김영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애도 행렬도 이어졌다. 김영하는 고 최고은씨가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행태에 대해 꼬집기도 했다.
최 작가의 죽음에 영화계에서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부조리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은 지난 8일 "최 작가의 죽음은 명백한 타살"이라며 "창작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 시스템과 함께 정책 당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고, 지난 9일에는 민주당 최문순 의원이 보도자료를 통해 "예술인 복지법이 국회에서 조속히 논의돼 제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10일에는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1 콘텐츠 정책 대국민 업무보고'에서 영화 제작자 환경에 대한 개선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최 작가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거나 갖은 논란으로 인해 자칫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사건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이에 관해 이현승 감독은 최근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과 관련해 일어나는 여러 논쟁들에 대해 "죽음들을 자기 입장에서 이용하는 짓들은 이제 그만두었으면 한다"며 쓴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 작가의 죽음이 영화산업의 부조리한 시스템과 스태프들의 처우와 관련한 병폐를 공론화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노조 최영재 사무처장은 지난 14일 머니투데이 스타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고 최고은씨의 죽음으로 정치권이나 관련 부처에서도 영화인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 같다"며 "영화 스태프들이 사회 안전망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조 차원에서도 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노조가 8일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의 2009년도 연평균 소득은 623만원이라고 한다. 월급으로 치면 52만원이 채 되지 않는 액수.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제 2, 제 3의 최고은 사태 또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언제까지 청춘의 꿈을 담보로 희생을 강요할 텐가. 이제는 슬픔과 애도, 분노와 반성을 넘어 구체적인 변화와 개선의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