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정도 350만명 봤으면 이제 조금 자세하게 얘기해도 되잖아~. 스포일러라 하면 아니 아니 아니~되오.'
그동안 무척이나 얘기가 하고 싶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에 대해 그리고 배우 황정민에 대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 13일 현재 전국관객 350만명을 넘겼으니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도 '스포일러'라 욕은 안 먹겠다.
사실 기자는 영화 개봉 전 '신세계'의 제작자, 모 유명 감독과 함께 간단히 술 한 잔을 했다. 주위에 따르는 배우와 스태프가 많은, 재미있고 인간미 넘치는 복 받은 제작자와 감독이다. 황정민 얘기가 나왔을 때 감독이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이 제작자로부터 황정민 매니저가 영화출연료를 제값에 계약하고 오자 "그러면 안되지"라며 출연료를 자진해서 깎았다는 것.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자와 황정민과 인연은 지난 2001년 뮤지컬 '토미' 관련해서 세종문화회관 지하연습실에서 딱 한 번 인터뷰한 게 전부다.
어쨌든 '신세계'는 폭력조직에 잠입한 경찰 이자성(이정재)과 그를 친동생처럼 여긴 폭력조직 실세 정창(황정민)의 이야기다. 이러구러 영화 초반 지나가고 처음 정창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야말로 '빵' 터졌다. 흰색 재킷에 검은 쫄바지, 검은 선글라스에 뒷머리에 힘을 준 퍼머머리.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신발이...기내에서 신는 초경량 슬리퍼! 번듯한 국제공항을 제집처럼 여기는,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안하무인 깡패 정청의 캐릭터는 이 '슬리퍼'로 한 줄 요약됐다. 우악스러운 정청의 슬리퍼 발길질에 비틀댄 건 비단 영화속 '조직원'들만이 아니었을 게다.

황정민의 '디테일'은 '신세계'에서 차고 넘쳤다. 항상 흰색 셔츠 소매가 재킷에 비해 길게 나오는 건달들의 '폼생폼사' 스타일과, 말끝마다 "씨바, 브라더"를 외친 상스러운 말투는 기본. 영화 막판 '빨대' 처단신에서 보여준 더할 나위 없이 흉했고 볼품사나웠던 쩍벌남 포스, '빨대'가 바로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호기 있게 '간빠이'를 외친 마음좋은 이웃집 형님 아우라. 여기에 영화 최대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 할 핏빛 낭자 엘리베이터 격투신의 마무리 손짓과 멘트 "너, XX. 이리 와 봐!"는 오히려 처량하기까지 했다.
'정청'은 황정민이 특별출연했던 지난 2005년 4월 개봉작 '달콤한 인생'(감독 김지운)의 '백사장'과는 또 달랐다. 둘 다 깡패에 건달이긴 오십보백보지만, 백사장의 포스는 정청보다 더 위험했고 더 비열했으며 더 집요했다. 이건 백 마디 말보다 백사장이 처음 등장한 순간 '그냥' 명백했다. 배트맨영화의 조커처럼 입가에 큰 흉터를 가진, 이빨마저 백상어처럼 날카로운 백사장이라니. 더 놀라운 건 슬리퍼, 입가 흉터 이 모든 디테일이 황정민 자신의 아이디어라는 것.
이 백사장이 같은해 9월 개봉한 박진표 감독의 멜로 '너는 내운명'에선? 에이즈에 걸린 다방여종업원 은하(전도연)를 순정을 다 바쳐 끝까지 사랑한 시골총각 석중으로 변신했다. 그 허름한 옷차림과 온몸의 소똥냄새, 검게 그을린 까칠한 얼굴피부와 순박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결혼식을 앞두고 하얀 운동화를 매만지던 석중의 바쁘고 떨리는 손놀림은 진정 '디테일'계의 슈퍼갑이었다. 하긴 '댄싱퀸'(감독 이석훈)에서 "여러분, 지금 분유값이 얼마인지 아세요?"라는 TV토론 격정 멘트에서조차 살짝 '어눌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집어넣은 배우가 바로 황정민 아니었나.
한마디로 복되다. 이런 배우를 1년에 한두 편씩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관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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