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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BIFF 돌아보기] 이회창 막으며 눈물 흘렀던 이유는?①

[20년 BIFF 돌아보기] 이회창 막으며 눈물 흘렀던 이유는?①

발행 :

전형화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20년 비하인드 스토리

강수연,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강수연,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1일 영화의 바다로 떠난다. 영화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부산에 세계적인 영화제가 생긴 지, 어언 20년이 흘렀다. 말고 많고 탈도 많았던 부산국제영화제 20년 뒷이야기를 전한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회고와 김지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 등을 인용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출범의 숨은 공신 박광수 감독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 개국공신은 김동호 현 명예집행위원장과 이용관 집행위원장, 박광수 전 부집행위원장, 전양준 부위원장, 오석근 현 부산영상위 위원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등이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은 80년대 부산에서 터를 잡고 비평활동을 하던 평론가였고, 박광수 오석근은 현역 영화감독이었으며, 김동호는 문화부 차관과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한 정통 관료 출신이었다.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들자는 논의는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이 90년대 초반부터 해외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세 사람은 영화평론지 '영화언어' 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1992년 페사로영화제에서 한국영화특별전을 기획하면서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감독 등과 안성기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이 초청받으면서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부산영화제 창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논의는 시작됐지만 돈이 없었다. 마침 파라다이스호텔에서 관심이 있다며 시드머니를 약속하면서 이야기가 급진전됐다. 이용관 등은 부산영화제 선장으로 당시 영화계 존경을 받았던 김동호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영입하기로 마음먹었다. 1995년 8월1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이용관, 전양준,김지석과 김동호가 만났다. 며칠 뒤 김동호는 집행위원장을 수락했다.


그 뒤 오석근 감독이 사무국장으로, 박광수 감독을 부집행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이용관 위원장은 "당시는 열정은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영화제를 만들 수 있을지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박광수 감독이 해외영화제를 많이 다니면서 쌓은 노하우와 아이디어를 쏟아내다시피 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박광수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숨은 공신"이라고 덧붙였다.


#파라다이스 호텔 지원철회..악전고투의 연속


출범까지 위기의 연속이었다. 시드머니를 약속했던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약속을 철회했다. 김동호 위원장이 부산시와 당시 대우그룹 정희자 아트선재 회장을 찾아가 재정 지원을 요청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러 기업들의 후원으로 첫 행사는 총 22억원의 예산으로 꾸려졌다. 당시 부산시는 3억원을 지원했었다.


지금이야 영화제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화제라고 하면 시상식을 떠올리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국제영화제를,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연다고 하니 이해가 쉽지 않았다. 창설 멤버들은 당시 만드는 사람들이 부산사람이고, 칸이나 베니스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려야 한다며 궁색한 이유를 댔어야 했다.


영화제 운영 노하우가 없기에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오석근 감독이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 가서 업무를 배워오기도 했다. 모범적으로 열렸던 싱가포르영화제는 여러 이유로 2012년과 2013년 열리지 못했다가 지난해 다시 개최됐다. 이번에는 부산영화제에서 싱가포르영화제에 어드바이저로 많은 도움을 주니 격세지감이다.


당시는 한국에 자막 시스템이 없어서 일본에서 시스템을 구해와 한글 자막을 넣었다. 시간이 부족해 일부 영화에는 한글 자막을 못 넣고 영어 자막만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티켓 시스템도 없어서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데 스폰서로 참여한 부산은행 전산팀에서 밤을 세워가며 시스템을 개발해줬다.


#'크래쉬' 동성애 장면 삭제돼 상영


당시는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영화 심의를 받던 시절이었다. 국제영화제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공연윤리위원회는 영화제 상영작 모두를 심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169편을 다 볼 수도 없고, 심의비도 문제였다.


결국 심사위원들이 부산에 와서 절반 정도 보기는 했으나 노출 장면만 집중하는 정도였다. 심의비도 상징적인 비용만 받는 걸로 정리됐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공연윤리위원회는 동성애 장면을 이유로 '크래쉬' 수입심의를 보류했었다. 하지만 수입사가 일부 분량을 삭제하면서 영화제에 출품했고, 영화제는 확인을 못한 채 상영을 하면서, 국제영화제 상영작이 편집된 채 틀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는 3회 이상 개최, 3개국 이상 영화가 참가하는 영화제는 심의를 면제한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공연윤리위원회는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바뀌었고, 모든 영상물은 사전심의 대신 등급 분류를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산영화제, 한국 영화제 틀을 만들다


통관도 문제였다. 세관에서는 수입 외화에 관세를 매기는데 부산영화제 초청작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김동호 위원장이 세관을 찾아가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수입하는 게 아니라 끝나면 모두 돌려주는 영화들이라고 설득했다. 이런 설득 끝에 간신히 관세를 면제받을 수 있게 됐다.


통관, 국고보조금, 심의 등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영화제들의 틀은 부산영화제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회창 총재를 막아서면서 눈물 흘렸던 사연


부산영화제는 시작부터 영화인과 관객이 영화제 중심이란 원칙을 세웠다. 정치인들이 참석할 경우 소개만 하지 멘트는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시작부터 지켜왔다. 초창기에는 대통령 동영상 축하 메시지를 상영했으나 이마저도 없앴다.


제2회 부산영화제가 열린 1997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개막식에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참가했고, 이틀 뒤에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남포동 피프광장을 찾았다. 김대중 총재가 입장할 때 소개 멘트만 했고, 이회창 총재가 피프광장 무대에 올라가 인사하려했으나 끝까지 막아섰다.


이후 문정수 당시 조직위원장과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관계자들에게 험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문정수 시장은 이회창 총재 앞을 가로막던 오석근 감독의 눈물을 보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문 시장은 "만약 오석근 감독에게 끝까지 비키라는 요구를 했다면 시장을 한 번 더 하지 않았겠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이렇게 지켜진 전통은 계속됐다. 2007년 개막식에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찾았을 때도,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찾았을 때도 소개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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