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훈정(41) 감독은 충무로의 소문난 이야기꾼이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꾼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를 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출발은 어려웠다. 2011년 '혈투'로 데뷔했을 때 4만 3947명이라는 기록적인 흥행 실패를 거뒀다. 사라질 듯 했던 박훈정 감독은 2013년 '신세계'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그가 '대호'를 차기작으로 결정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신세계2'라는 보장된 길이 예비돼 있는데 엄청난 예산에 100% CG로 만들어야 하는 호랑이 사냥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박훈정 감독은 '대호'라는 힘든 길을 택했고, 고전영화 같은 만듦새로 결과를 내놨다. 145억원이라는 돈이 든 영화를, 뚝심 있게 만들어낸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만드는 과정에서 말도 참 많았다. 그의 고됐을 이야기를 들었다.
-'혈투' 기자시사회 때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 인물들의 갈등을 그리는 영화라면 전개가 더 빨라야 되지 않겠냐"고 질문했었다. 당시 "더 느리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정도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었다. '대호'를 보니 그 때 한 말이 무슨 의미였는 지 비로소 알겠던데.
▶'혈투' 때는 욕심은 있는데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느리게 감정을 쌓아서 깊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방법을 좀 알게 된 것 같다.
-'대호' 기획은 어떻게 했나. 사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이야기는 여러 콘텐츠가 있다. 영화로도 몇 군데에서 준비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에 호랑이CG로 다들 엄두를 못 내고 엎어졌었는데.
▶2008년에 시놉시스를 썼고, 2009년 6월에 시나리오가 나왔다. 그 시기를 기억하는 건 당시 시나리오 작가 시절이라 나오자마자 팔렸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쓸 때만 해도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 안 했다. 그저 제작자들이 좋아할 소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신세계' 끝나고 완전히 '대호'는 잊고 있었는데, 이 판권이 다른 회사로 갔다가 또 다른 회사로 돌고 돌았다. 마침 '신세계'를 같이 한 사나이픽쳐스 한재덕 대표와 '대호' 이야기를 했는데 "좋다"며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하시라"고 했다. 좋은 감독을 찾으시라며.
그 뒤로 NEW에서도 하자고 해서 "잘 하시라"고 했다. 감독도 추천했었다. 그런데 최민식 선배가 하겠다고 하고, 주위에서 다들 "네가 하라"고 하더라. 난 정말 한다고 하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대호'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난 욕망이 드글드글 하고, 나쁜 사람들이 물고 물리는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그런데 '대호'는 착한 사람도 많이 나오고. 아무튼 끝까지 안 하려 했는데 결국 하게 됐다.
-요즘 영화들은 호흡이 무척 빠른데 '대호'는 정반대로 느리다. 그렇게 감정을 쌓는 게 고전영화 같기도 하던데.
▶난 '대호'가 정서적인 영화라 감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세계'도 요즘 영화에 비하면 호흡이 짧지는 않다. 이런 말을 하면 자칫 오해할 수도 있는데 요즘 한국영화 호흡이 뒤에서 누가 쫓아오듯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145억원이라는 돈이 든 영화라 빨라야 하나 라는 부담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신세계'도 클래식하게 만들고 싶었기에 '대호'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제작보고회에서 최민식이 어차피 호랑이는 CG이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 천만덕 역할에 이야기가 집중돼야 사람들이 호랑이에도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했다. 반대로 감독 생각은 어땠는지 궁금한데. 영화는 최민식 뜻과는 달리 호랑이와 천만덕의 동질감에 중점을 뒀는데.
▶최민식 선배의 뜻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대호'는 시나리오부터 만덕과 호랑이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기획부터 제작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들 찍었다. 그렇기에 편집을 그렇게 못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편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야기니깐.
-빠르게 이야기를 몰아갈 수도 있었지만 속도감을 포기한 대신 각각의 감정을 쌓는데 주력했는데. 감독의 선택일 텐데.
▶맞다. 선택이었다. 길게 느껴져도 정서적인 걸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를 쫓는 사람들과 호랑이의 대결을 속도감 있게 만들면 맨 마지막 장면이 계륵이 될 것 같았다. '대호'는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다.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야지 맨 마지막에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느리게 감정을 쌓는 건 좋았지만 감정이 동어반복되는 장면들이 몇 곳 있다. 편집해도 이야기에 무리가 없을 장면도 있고. 현재 버전이 139분인데 더 편집 했다면 길다는 느낌은 좀 줄일 수도 있었을텐데.
▶편집을 한다면 5분 정도는 덜 수 있었을 것도 같다. 말한 것처럼 감정이 동어반복적인 부분이 분명 있기에 편집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곳들도 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래도 5분이니깐 지금 버전이 최선인 것 같다. 더 많이 편집을 하면 더 상업적일 순 있겠지만 이 영화의 성격과는 안 맞을 것 같았다.
-'신세계'는 인물을 클로즈업으로 타이트하게 잡았다면 '대호'는 지리산을 아주 넓고 깊게 담았다. 지리산을 또 다른 주인공처럼 그려냈는데.
▶정정훈 촬영감독과 이모개 촬영감독 스타일 차이일 수도 있고, 영화 콘셉트에 대한 차이일 수도 있다. '신세계'는 인물들이 중요했기에 땀구멍 하나까지 다 보여주고 싶었다. 반면 '대호'는 자연이 주인공이기에 지리산을 그대로 담고 싶었다. 지리산은 높지 않은 대신 깊고 넓은 산이다. 이모개 촬영감독님이 먼저 '대호'는 자기가 해야 한다며 찾아오셨다. 이모개 촬영감독님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리산을 넓고 깊게 담아야겠다고 하셨다.
-감정을 쌓는 건 느리게 했지만 호랑이 습격 장면은 엄청난 스피드로 찍었다. 마치 호랑이가 사람들을 덮치는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 것 같은데. 이 장면들은 특히 찍기가 어려웠을 법하다. 감독의 연출력이 중요했을 것 같고. 실제론 없는 호랑이를 가상으로 있다고 하면서, 몹신(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장면)이니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맞춰야 하고, 그러면서 없는 상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하고, 그것도 동선도 다 달라야 했을테니.
▶말한 것처럼 호랑이 습격 장면은 몹신이다. 일단 호랑이를 연기하는 곽진석 배우가 습격을 하고 달려가는 것으로 계속 연습을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뛰고 도망가야 할지 동선을 다 체크했다. 그러면서도 저 스피드가 아니라 시속 80㎞로 덤벼드는 것이니 더 빨리 뛰라고 주문하고 몇 번을 거듭했다. 그렇게 계속 찍고 찍고 또 찍어서 하나씩 오케이 컷을 건졌다.

-일제 강점기에 마지막 호랑이 사냥 이야기다. 민족감정을 훨씬 자극할 수 있었는데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게 이 영화에 맞기도 하지만 그래서 덜 상업적이란 소리도 나오는데.
▶기획할 때 NEW에서도 기왕에 일본군이 나오니 좀 더 민족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대호'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호랑이가 그 시기에 있었으니 그 시대를 다뤘을 뿐이다. 호랑이가 일본군만 물어죽이는 게 말이 되나. '대호'는 자연 대 인간 이야기여야지, 조선 대 일본 이야기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설 '위대한 왕'이랄지, '늑대왕 로보'랄지, '백경'이랄지, 그런 작품들의 영향도 묻어나는데. '신세계' 때도 그랬지만 다른 작품의 영향을 받은 걸 구태여 피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다. '위대한 왕'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도 맞다. 워낙 위대한 작품들이니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다. 어설프게 피해서 영화가 이상하게 나오느니 그 영향을 인정하는 게 맞다. 고전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고.
-산을 지배하는 호랑이를 뜻하는 '산군'이랄지, 호랑이 새끼를 뜻하는 '개호주'랄지, 자막을 넣어서 설명해줄 법도 한데 다 뺐다. 하나하나 더 자막을 붙이기 마련인 요즘 영화들과 다른 부분이기도 한데.
▶자막을 넣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내 그림에 그런 걸 넣지 말자고 했다. 그림 지저분 해진다고. 관객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일본군 대사도 중용한 것 외에는 자막을 넣지 말자고 했는데 그건 다른 나라 말이니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서 할 수 없이 넣었다.

-뭐니뭐니해도 호랑이를 표현하는 게 가장 어려웠을 텐데.
▶입찰을 했던 CG업체 중에서 '대호'를 같이 한 '포스'만 호랑이 CG경험이 없었다. 다른 회사들의 호랑이 CG를 보니 정말 진짜 같더라. 그런데 우리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그 호랑이 CG와 어울릴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CG를 어떻게든 활용할 테니깐. 그래서 '대호' 호랑이CG는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스는 거의 모든 컷에 CG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와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맞았다.
일단 호랑이는 기본 표정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달라고 주문했다. 호랑이가 슬프고, 우울하고, 기쁜 걸 사람들이 어떻게 구분하겠나. 그저 사람이 자기 감정으로 보니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대호'는 이미 드라마가 있으니 감정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호랑이 감정도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위적으로 감정을 만들면 오버라고 봤다.
후반 작업을 할 때는 배우 한 명과 새로 영화 한 편을 찍는 느낌이었다. 호랑이가 이 때는 이렇게 고개를 돌리면 안되고, 저 때는 여기를 봐야 하고, 일일이 작업을 같이 했다.
-마지막으로 가면 사실의 영역에서 전설이나 신화의 영역으로 가는데. 최민식과 호랑이가 대결하는 산 꼭대기는, 지리산에는 그런 봉우리가 없기도 하고.
▶맞다. 그래서 앞의 감정들이 쌓여야 맨 마지막을 관객이 납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호'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는 게 그런 의미기도 하고. 사실 지리산에 그런 봉우리가 없는 것도 맞다. 제작진끼리는 지리산이 4분의 1만 입산이 허용됐기에 실제로 그런 곳이 있을 수도 있다고 자위했다.
-마지막 최민식이 호랑이를 기다리는 장면은 일본 곰사냥꾼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글쎄, 그건 전혀 염두하지 않았다. 그 장면은 '백발마녀전'에서 장국영 장면을 오마주했다.
-최민식이야 두말할 나위 없고, 최민식 아들 역할을 맡은 송유빈이 전반부 자칫 느슨해질 분위기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송유빈은 캐스팅할 때부터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최민식이 어마어마한 선배인데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예컨대 최민식이 연기를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고 조언하면 "알았다"고 하고선 막상 슛이 들어가면 자기식대로 한다. 그런데 그게 영화와 너무 잘 맞았다.
-차기작은. '신세계2'는 하기는 하나.
▶'신세계2'도 그렇고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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