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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스틸러]김희원 "연기가 좋아진 건 30살 넘어서였죠"①

[心스틸러]김희원 "연기가 좋아진 건 30살 넘어서였죠"①

발행 :

김현록 기자
배우 김희원 / 사진=김창현 기자 chmt@
배우 김희원 / 사진=김창현 기자 chmt@


◆ 배우 김희원. 본명 김희원.

◆ 1971년 1월 10일생.

◆ 방탄유리 너머 원빈에게 총을 맞을 때 관객 모두가 후련해 했던 '아저씨'의 만석부터, 임시완을 구박하고 이성민에게 뻗대던 '미생'의 박과장,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의 바람둥이 최윤기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안 가리는 나쁜놈, 나쁜놈, 나쁜놈. 하지만 실제론 알코올보다 커피를 사랑하는 내성적인 남자.

◆ 스크린 데뷔 '1번가의 기적'(2007)

◆ 연기 외 취미·특기. 당구.


악역은 연기일 뿐~ 이라고 해도 강렬한 잔상은 오래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최근 극장에서 만난 배우 김희원(46)이 그랬다.


어린이 실종사건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가려진 시간'에서 그는 재혼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의붓딸과 사는 아버지로 등장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김희원 곁에 잔뜩 움츠린 소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엄습했다. 영화 중간 '저놈(!)이 애들을 감췄다'는 추측을 한 관객도 더러 나왔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무뚝뚝한 아버지의 진심이 드러난 후반부엔 슬며시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이미지에 매몰되거나 무리하게 벗어내는 대신 영리하게 써먹으며 관객과 '밀당'을 하는 셈이다. 김희원은 "사실은 엄태화 감독님이 의도했다"며 허허 웃었다.


"스트레스 안 받아요. 오해를 사게끔 콘셉트를 잡은 것도 있고요, 속으로는 그렇게 봐주셔서 성공했다고 생각했어요. 배우가 자기 색깔을 찾는다는 게 스스로 안 되는 것 같아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연기하다 보면 제 색깔을 관객들이 만들어주는 거죠. 제가 코미디 영화로 1000만을 했으면 어느 날부터는 코미디 배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저는 악역 배우 아니에요' 백날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이아바'(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를 하고 나니 '저 사람 웃긴 사람이야' 소리도 듣고요. 제게 어떤 색깔이 입혀질지, 어쨌든 제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얼마 전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선 한번에 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막무가내 바람둥이였다. '어디 한 번 망가져 보자' 싶어 "최대한 오버했다"는 게 김희원의 설명. 김희원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며 "김석윤 감독이 연기도 리얼하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 목표가 그거였다"고 했다. 징글징글하게 망가지고 처참하게 응징당하는 마성의 바람둥이. 목표는 적중했다. 철없는 막장 아저씨에 시청자는 폭소했고, 김희원은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10년 영화 '아저씨'의 극악무도한 악당 이후 '악역 전문'으로 불리던 그라 더 웃겼다.


배우 김희원 / 사진=김창현 기자
배우 김희원 / 사진=김창현 기자


이제 스크린 데뷔 10년을 맞이했지만 그의 연기인생이 시작된 건 1988년. 무려 30년이 다 되어간다.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 어쩌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김희원은 고3 수험생이었다. 달리 꿈이 없었다고 했다. 졸업하면 뭐하고 먹고사나 생각은 하면서도 놀기 바빴던 시절이었다. 수능 대신 학력고사를 보던 그때, 2교시 시험을 마친 김희원은 지각을 했는지 입장을 못 하고 울고 있던 여학생 하나를 시험장에 대신 집어넣곤 그 길로 지하철에 올랐다. 중간에 나왔으니 시간을 때워야 해 지하철로 종점 수원까지 갔다. 신문 구인란을 살폈다. 어차피 대학은 못 갈 테니 당장 취직이 급했다. 그런데 웬걸, 태반이 전문대졸 이상이라야 했다. 그런데 '고졸이상'이 눈에 띄었다. 연.극.배.우.모.집.


냉큼 오디션에 갔다. 학교에서 입던, 하얀 줄이 들어간 파란 '추리닝' 차림은 김희원뿐이었다. 그때부터 시선집중. 급기야 오디션 보러 온 사람들까지 김희원을 구경하는 처지가 됐다. 노래를 부르라기에 '선구자'를 부르고 춤에 연기까지 시키는 대로 다 하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너무 창피해 '못 올 데를 왔다' 싶었다. 합격 전화가 왔는데도 안 나갔다. ("뽑힌 것도 신기해요. 저 놈이 괴짜인가 싶어 기대감으로 뽑으셨는지.") 또 연락이 와 어쩔 수 없이 갔다. 거기서 본 풍경이 김희원을 움직였다.


"지각을 했더니 벌써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 첫 인상이 어땠나면, 자기 인생을 위해서 누군가 땀을 흘리는 걸 처음 본 것 같았어요. 조금 감동을 받았어요. 나는 내 인생을 위해서 땀 흘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축구 농구 하고 노느라 땀은 흘려봤죠. 하지만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게 컸어요. 나도 내 인생을 위해 땀 흘리는 걸 한 번쯤 해봐야겠다."


사진


입단한 지 얼마 안 돼 1989년 3월 작은 역할로나마 처음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그때도 연극배우는 고단한 직업. 막내는 무대 세트도 직접 만들고 공연도 하고 철거도 제 손으로 해야 했다. 구타도 심심찮게 당했다. 더욱이 생계를 위한 일이라면 연극배우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9개월 첫 공연을 하고 받아든 돈이 딱 11만 원이었다. 오달수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시절, 달에 12만 원을 받고 거금이라며 좋아한 적도 있다. 생활고로 몇 번이나 연기를 그만뒀다. 무대 일 하며 익힌 페인트며 목공이 기술자 수준이 돼 호주에서 페인트공을 하며 산 적도 있다. 수입이야 훨씬 좋았다.


"그만두고 그만두고 하다가 왠지 모르게 하고 싶어 돌아오고 그랬어요. '연기가 너무 좋아서 돈 안 줘도 버틴다'이건 아니었거든요. 연기를 사랑하기 시작한 건 30살 넘어서예요. 그때부터는 연기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턴 죽을 때까지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20대 때는 연기를 하면서 매일매일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도 그냥 열심히 했어요. 졸업하자마자 배역을 받았고 소위 비중있는 역할을 자꾸 주시니까 처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나. 스스로도 '도대체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궁금했어요. 지금도 궁금해요. 20대 김희원에게 묻고 싶어요. 그냥 '하나님이 나를 이쪽으로 보냈나'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인터뷰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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