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감독의 야심 찬 실험작 '옥자'가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신화 같은 서사와 동화 같은 마무리. 박찬욱 감독에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있었다면, 봉준호 감독에겐 '옥자'가 그랬던 것 같다.
12일 서울 대한극장에서 '옥자' 기자시사회가 열렸다. 멀티플렉스들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옥자'에 보이콧을 선언한 탓에, 그간 기자시사회와 인연이 사라지다시피 했던 대한극장에서 공개됐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에, 제7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작, 그간 논란으로, 대한극장에는 500여명이 넘는 취재진과 영화 관계자들이 몰렸다.
마침내 공개된 '옥자'는 564억원(5000만 달러) 짜리 소품에 가까웠다. 아이가 모험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원형 서사에, 지극히 동화 같은 착한 결말. 디스토피아를 그린 '설국열차' 같은 활극을 기대했다면 '옥자'가 아쉬울 법하다. 반면 봉준호 감독이 그린 동화 같은 소녀의 모험담을 보고 싶다면 '옥자'에 푹 빠질 만하다.
글로벌 식량 기업 미란도.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슈퍼 돼지 발견과 육성을 선언한다. 칠레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슈퍼 돼지 새끼를 전 세계 자회사에서 육성한 다음, 10년 뒤 세상에 공개하겠다는 것.
그로부터 10년. 강원도 산골소녀 미자(안서현)는 할아버지와 거대돼지 옥자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미자는 옥자를 가족이라 여긴다. 옥자도 마찬가지. 그런 미자에게 미란도 그룹의 얼굴이자 동물 애호자라는 조니 윌콕스 박사(제이크 질렌할)이 등장한다. 옥자를 뉴욕에서 열리는 슈퍼 돼지 콘테스트로 데려가기 위해서다. 옥자를 데려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미자는, 말리는 할아버지(변희봉)를 뿌리치고 서울까지 내달린다.
그런 미자 앞에 나타난 의문의 조직. 동물 보호 단체 ALF는 미란도 그룹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옥자와 미자를 이용하려 한다. 루시 미란도의 계획이 친환경적인 슈퍼돼지 육성이 아닌 유전자 조작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것. 결국 옥자는 소동 끝에 미국으로 끌려간다. 미자는 미란도 그룹의 새로운 이미지로 삼으려는 루시의 계략으로 미국으로 초청된다.
오로지 옥자와 함께 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미자, 둘을 이용해 미란도 그룹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ALF, 옥자를 이용해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루시, 그리고 루시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세력.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람들 속에서 미자와 옥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옥자'는 야심 찬 프로젝트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에서 제작됐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 봉준호 감독의 동화를 영화로 구현하기엔, 그의 재량을 펼치기엔, 5000만 달러라는 제작비를 선뜻 내놓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만큼 '옥자'는 야심 차다. 작지만 큰 꿈. 동화 같은 모험담. 봉준호 감독이 아니었다면, '옥자'라는 동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소녀가 모험을 떠난 뒤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 단순하지만 강하다. 봉준호 감독은 이 단순한 서사에 구태여 많은 걸 담지 않았다. 사건을 일부러 키우지 않았다. 해결마저 단순하다. 그래서 동화다. 그래서 정확하다. 그래서 '옥자'가 전할 이야기는 명료하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잠들기 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만들고 싶었던 듯 하다.
'옥자'의 강원도는 '이웃집 토토로'의 신비하고 따뜻한 정경이다. '옥자'의 뉴욕은 인간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깨비 성이다. '옥자'에 등장하는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ALF의 수장) 등이 애니메이션 악당들처럼 기괴하고 과한 건, 동화 속 악당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악당들마저 동화 같다.
'옥자'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오마주를 바쳤다. 미자와 옥자의 초반 낮잠 장면은 '이웃집 토토로'의 그 장면 그대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에서 익히 봤던 씩씩하고 용감한 소녀의 모험담. 소녀판 '미래소년 코난'. 안서현으로 완성됐다. 13살 소녀 안서현은 뛰고 또 뛰고 또 뛰며 씩씩하게 가족을 찾는다. 무서운 세상에 홀로 당당하게 맞서는 소녀. 봉준호 감독은 안서현을 바리데기 공주 마냥 지옥을 다녀와도 꿋꿋한 소녀로 만들었다.
'옥자'는 질문을 던진다. 사람이 먹지 않는 돼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이 먹으려 생명을 창조한다는 건 옳을까? 거대한 도축 시스템은 윤리적인가? 반려동물과 가축은 구분돼야 하나? 이 질문들을 단순한 이야기에 심었다. 그리하여 되묻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동화가 아닌,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동화. 봉준호식 동화다. 봉준호 감독이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던진 질문이, 봉준호와 함께 성장해 '옥자'에 담겼다. 그는 여전히 꿈꾸는 소년인 것 같다.
슈퍼돼지 옥자 CG는 완벽하다. 등장한 뒤 곧 CG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옥자'의 착한 눈, 슬픈 눈, 애틋한 눈. CG로 눈을, 눈의 감정을, 이렇게 잘 구현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 탓에 돈 든 티가 안 나긴 한다. 너무 자연스러운 덕이다.
'옥자'는 넷플릭스와 일부 극장에서 공개된다. 시네마스코프로 강원도의 넓은 숲을, 봉테일의 세삼한 숨결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극장을 추천한다. 극장에선 화려하고 거대한 볼거리를 봐야 한다는 관객이라면 넷플릭스를 통해 보길 추천한다. 돌비 애트모스는 극장과 홈시어터용으로 믹싱됐지만, NEW가 확보한 극장 중에선 파주 명필름아트센터에서만 구현된다.
6월 29일 공개. 12세 이상 관람가.
추신. 엔딩 크레딧 이후 쿠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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