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리차드 3세'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가장 매력적인 악인'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치고 어린 조카까지 죽인 추악한 악인은 15세기 영국 장미전쟁 시대의 실존 인물이 바탕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곱추에다 다리를 절고 손마저 뒤틀린 장애인이지만 탁월한 권모술수로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른 비정한 인물로 묘사했다. '리어 왕' '맥베스' 같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 흡인력이 상당하다.
리차드 3세는 조선시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세조를 연상시키지만 훨씬 더 뻔뻔하다. 그는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이야기를 주도하는 극의 주인공이자 화자, 해설자이기도 하다. 위선을 경멸하는 열등감 덩어리이자 타고난 거짓말쟁이기도 한 그는 관객에게만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친형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른 날, 불구인 자신을 향한 세상의 멸시를 체감한 그는 '왕이 되겠노라' 결심한다. 육체보다 심성이 더 비틀린 악인의 욕망이 터져나오고, 결국 그에게 휘말린 모든 사람들이 예고된 비극을 향해 질주한다. 제 불편한 몸까지 무기로 이용하길 서슴지 않으며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하다가 결국엔 그를 지켜보는 관객까지 구워삶는다.
배우 황정민이 리처드 3세를 연기했다는 점은 이 작품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스크린을 종횡무진 하면서 간간이 뮤지컬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연극 무대는 '웃음의 대학' 이후 10년 만. 그는 말 그대로 원 없는 열연을 펼친다.
인간적 도의 따윈 안중에 없는 서슴없는 악행을 펼치면서도 틈틈이 관객을 웃기고 연민마저 자아내고야 만다. 런던탑에 가둬 죽인 조카들의 자그마한 관이 옮겨지는 비극의 순간에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관이 작아 저도 마음이 아프답니다' 능청을 떨며 관객의 웃음을 끌어낼 정도다. 경련이 일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몸을 한껏 구부린 채 굽은 등과 움츠러든 왼팔을 표현하면서도 온전히 무대를 장악하던 그가 조금씩 허리를 펴고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커튼콜에선 절로 환호가 터진다.
에드워드 4세로 분한 정웅인,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이자 리처드 3세의 정적인 엘리자베스 여왕 역의 김여진 또한 오랜만에 연극에서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다. 토해내듯 하는 고음으로 광기어린 저주를 퍼붓는 마가렛 왕비 정은혜 또한 강렬하다.
나약한 양심을 조롱하던 리처드 3세가 자신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원혼에 고통스러워하는 전개가 다소 급작스럽긴 하지만 대중적인 접근으로도 보인다. 단순한 줄거리 속에 녹아 든 입체적인 인물들의 매력, 고전의 힘을 느끼는 데 손색이 없다. 3월 4일까지.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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