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는 1초에 90여 회 날갯짓을 한다. 꽃 속의 꿀을 빨며 힘찬 날개짓을 하는 벌새는 새라기보다는 마치 벌 같다. 꿀벌보다 더 부지런하게 날갯짓을 하며 꿀을 먹는다는 벌새는 희망을 상징한다.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는 1994년 평범했지만 뜨거웠던 한국을 살아가던 14살 중학교 2학년 소녀 은희(박지후 분)의 모습을 통해 감성적이면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벌들 사이에서 벌보다 빨리 움직이며 꿀을 빨아 먹는 벌새처럼, 어른들 사이의 은희 역시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맺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른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 한국은 앞만 보고 달렸다. 경제성장이 최우선이었고, 그 속에서 부모들은 자식 교육에 열을 올렸다. 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한국을 보며 공부를 해야 했고 개성이나 꿈을 포기하고 가고 싶은 대학교를 목표로 살았다.
떡집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강남 대치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은희는 날라리 큰 언니와 공부 잘해서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오빠가 만든 그늘에서 관심을 갈구한다.
은희의 가족은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다. 가부장적인 아빠, 일에 지친 엄마, 여동생을 때리는 오빠, 동생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언니, 완전한 날라리도 범생도 아닌 막내까지. 아빠는 잠시 외도를 하고, 오빠는 여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악인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여느 평범한 가정에서 생기는 일들을 영화 속에 물감 푼 듯 풀어낸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가족들의 삶과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은희의 행동 이유가 되고 또한 결과가 된다.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14살 은희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받는 상처와 위로가 관객에게 와 닿는 것은 이를 따라가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은희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배우 박지후의 힘이다. 특히 은희가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를 만나며 변화하는 모습은 잔잔한 물결처럼 영화 속에서 찰랑거린다. 큰 파동이나 극적인 일 없이도 물들어가는 그 모습이 인상 깊다. 김새벽은 미스터리하고 허무해 보이지만 따뜻한 영지 역할을 본인의 매력으로 소화해 내며 영화에 색깔을 더한다. 상처받은 은희를 달래 주는 영지의 모습은 꿀을 찾는 벌새에게 꿀을 내주는 꽃 같다. 영지는 정적이고 조용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은희의 세상에서 빛을 발한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1997년의 사건들은 다이내믹한 현실에서 살아온 우리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평범한 소녀가 미국 월드컵, 김일성 사망을 거쳐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겪는 모습을 보며 그 시대를 살았던 스스로를 돌아보고, 위로하게 만든다.
'벌새'는 평범하고 소소한 웃음을 전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중2병'이 그 당시라고 왜 없었으랴. 후배에게 세 보이고 싶고, 남자 친구에게는 예뻐 보이고 싶은 사춘기 소녀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감성이다. '중2병'이라고 생각했던 사춘기의 모습이, '벌새'에서는 사랑받고 싶어 하고 관심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노력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따뜻하다.
또한 '벌새'는 한 개인에 대한 영화이면서 가족에 대한 영화다. 영화 속 은희의 가족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싸우는 장면도 많다. 아빠와 엄마가 부부싸움을 한 뒤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박수연 분)는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콩가루일까"라고 말한다. 서로에게 인간적인 관심 없이 결과만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가족이란 이래야 한다'는 틀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렸다.
성수대교 다리가 붕괴 됐을 때 죽을 줄 알았던 언니가 무사히 들어오자 밥 먹다가 갑자기 우는 은희 오빠의 모습이나 은희의 침샘 옆에 혹이 생겨 수술하게 되자 병원에서 목 놓아 우는 아빠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은희의 세상도 와르르 무너졌다. 다리 붕괴와 함께 친구들을 잃은 수희와 자신이 아끼던 사람을 묻어야 했던 은희가 붕괴 된 다리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대를 살았던 나의 모습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 한해 동안 많은 일을 겪고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울 희망을 가질 것을 알게 된다.
'벌새'는 한 여중생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한 개인과 한 가정을 통해 한국 사회를 담아냈다. 은희의 모습 속에는 내가 있고, 내 친구가 있고 우리 가족이 있다.
'벌새'는 개봉 전 국내외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먼저 인정 받았다. 제 23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제 69회 베를린국제 영화제, 제 18회 트라이베카국제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서 25관왕을 석권한 '벌새'가 가을로 넘어가는 극장가에서 관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8월 29일 개봉. 러닝타임 138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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