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진호 감독이 돌아왔다. '덕혜옹주' 뒤로 다른 작품을 준비하던 그는 돌연 방향을 바꿔 '천문'을 만들었다. 세종대왕과 장영실 이야기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만의 방식으로 풀었다. 허진호 감독의 긴 이야기를 옮긴다.이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차기작으로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 영화화를 준비하다가 '천문'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설계자들'은 시나리오가 잘 안 풀려서 계속 작업 중이다. '천문'은 원래 지금 제작사에서 준비하다가 여러 이유로 프로젝트가 많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측우기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당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이었는데, '덕혜옹주'를 같이 한 제작사라 인연이 깊어서 안여를 세종이 부서뜨리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냈었다.
그러다가 이지민 작가를 비롯해 여러 제작진이 지금 시나리오로 '천문' 프로젝트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한석규 최민식이 참여하기로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들어가기 전에 서로가 생각하는 인물과 해석을 갖고 많이 논의한 끝에 합의점을 찾아서 하게 됐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던데.
▶예컨대 문풍지를 먹칠로 칠하는 장면. 문풍지에 구멍을 뚫어서 별빛을 보여준다는 설정이었는데 조명을 치면 실현이 안되더라. 문풍지 밖에 조명을 놓으면 그냥 빛이 다 보이니깐. 그러다가 거기에 먹을 칠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둘이 냈다. 그럼 밤하늘 느낌이 나지 않겠냐며. 그건 CG가 아니다. 마지막에 장영실 별이 좀 더 반짝이는 것 외에는 전부 현장 불빛 그대로다.
한석규와 장영실이 궁에서 같이 누워 밤하늘을 보는 건 한석규의 아이디어였다. 원래는 내소사를 헌팅 했는데, 한석규가 꼭 같이 눕고 싶다더라. 동선이 애매해서 고민하다가 그냥 궁궐에서 하는 걸로 결정했다. 한석규는 처음부터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벗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자네 같은 벗이 있지 않은가"라는 대사도 한석규가 만들었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려 했나. 완성본은 마치 멜로 같은 분위기도 담겨 있는데.
▶한석규는 세종과 영실의 관계를 벗으로, 최민식은 주군으로 생각했다. 세종이 천민인 영실에게 벗으로 내려와 줬고, 같은 눈높이를 가져준 게 엄청난 감동이었을 터다. 멜로나 퀴어 같은 느낌을 담으려 한 건 전혀 아니다. 둘의 관계를 사랑이랄지, 그런 의도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카메라로 둘의 눈높이를 맞추고 교차편집하면서 계급을 허물었는데.
▶처음 둘이 만났을 때, 엎드려 있는 영실의 앞을 지나가는 세종을 영실의 시점으로 찍으려 했다. 그러다가 세종이 영실 눈높이로 내려오면서 같은 위치에 놓이도록. 너무 설명이 길어져서 바로 들어갔다. 그 장면이 둘의 첫 장면이었다. 한석규가 자꾸 영실의 앞에 앉겠다고 하더라. 자신이 생각하는 세종은 궁금한 건 바로 다가가 묻는 사람이라며. 교차편집은 이모개 촬영감독이 워낙 잘 찍어서.
-사극을 만들 때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적인 상상을 더하는 법인데. '천문'에서 명 사신이 장영실을 끌고 가겠다고 한 건 허구인데.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란 상상을 해봤다. 실제로 조선 건국 초기 명나라와 조선은 긴장 관계가 있었다. 세종 때 혼천의를 허물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사신이 못 보도록 혼천의를 숨기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점에서 착안했다.
-'천문'은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인 동시에 세종대왕과 신하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마치 셰익스피어 궁정극처럼 밀도있게 담아냈는데.
▶이모개 촬영감독과 그 지점을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액션이 있는 게 아닌데도 팽팽한 긴장감을 어떻게 줄지 고민했다. 심플하게 가보자고 결정했다. 세종(한석규)이 김태우에게 "내가 영실을 가두라고 허락했냐"고 두 번 묻는 장면도 원래는 대사가 길었다. 그걸 생략하고 두 번 짧게 물어보면 긴장감이 훨씬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우들의 공이 크다. 한석규와 김태우도 그렇고, 한석규와 신구 선생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영의정으로 나온 신구 선생님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인연이 있었는데, 신구 선생님과 다른 배우들이 연기로 부딪힐 때 어떤 긴장감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대선배와 연기한다는 긴장감. 허준호 같은 경우는 신구 선생님과 그 독대신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 신구 선생님과 불길이 튀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그 독대 장면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길게 늘어뜨리는 허준호의 연기도 탁월했지만 신구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색보정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하던데.
▶허준호의 연기 디테일은 모두 그가 고민하고 만든 것이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 그런데 신구 선생님이 대단한 게 눈동자를 비롯해 모든 게 연륜, 그 나이로 나온 깊이다. 깊고 검은 눈동자도 색보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처음에 분장팀과 이야기할 때도 그냥 신구 선생님은 수염만 붙이고 그 나이가 나오도록 하자고 했다. 존재만으로 좌중을 장악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상이었다.
아끼는 장면인데 편집된 게 있다. 세종이 아버지의 곤룡포를 입고 모든 신하를 부를 때 허준호가 근정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살생부를 갖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그때 신구 선생님이 계단을 올라오는데 허준호가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신구 선생님이 딱 허준호 앞에서 눈길 한 번 안 돌리고 옷을 살짝 들었다가 놓더라. 마치 너 같은 건 내 상대가 아니라는 듯. 너무너무 좋았는데 그 장면까지 붙이면 뒷 장면에서 호흡이 늘어지는 것 같아서 편집했다.
-한석규와 신구의 독대 장면도 탁월했는데. 칼이 없고 말로 싸우는데 카랑카랑하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이 강렬했다. 특히 신구의 대사는 너무 딕션이 좋아서 후시를 했는지 궁금하던데.
▶전혀 후시 없었다. 신구 선생님은 딕션이 워낙 명확했다. 기침 소리 같은 것도 전혀 후시가 없었다.
-나이 든 세종의 왼쪽 눈에 빨간 기운이 있는 건 CG인가.
▶아니다. 한석규에게 세종을 어떻게 그릴지 물어봤다. 한석규는 나이 든 세종을 그리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세종대왕이 눈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눈에 뭔가를 넣으면 어떨까란 아이디어를 냈고 렌즈를 끼자고 했다. 그런데 렌즈가 너무 불편했다. 끼는 데도 고통스럽고 계속 끼고 연기하는 것도 고통스러워했다. 렌즈 때문에 배우의 감정이 깨지면 안될 것 같아 CG로 하자고 제안을 했더니 한석규가 세종도 불편함을 갖고 살았을테니 자기도 그냥 렌즈를 끼고 연기를 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한석규는 렌즈를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매우 힘들어하면서 연기를 계속 했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침전에서 먹칠을 하면서 같이 있는 장면은 여러 결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침전 장면은 두 배우와 장영실의 천재성을 어떻게 보여줄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착안한 장면이다. 장영실이 뭘 만들면서 천재성이 드러나기보다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천재성이 드러났으면 했다. 그러다가 문풍지에 구멍을 뚫어서 별을 보여준다는 장면을 생각했다. 별자리를 대략 맞춰서 문풍지를 뚫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의 너의 별'로 북두성은 세종, 그 옆 별이 장영실의 별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본만화 '북두신권'에선 북두성 옆자리의 별은 사조성이라고 그걸 보면 죽는다는 설정이 있다. '천문'에서도 북두성 옆자리의 별이 장영실이라 결국은 죽는다는 암시를 남긴 것인지.
▶그런 설정은 처음 듣는다. 세종이 영실에게 "그럼 니 별은?"이라고 묻고 영실이 "천민은 별이 없다"고 하자 다시 세종이 영실의 별을 정해준다. 자신의 옆자리로. 그렇게 세종이 관계를 설정해주면서 영실과 같은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다.
-장영실이 한글을 세종이 만들면서 자신을 멀리했다고 질투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영실의 서러움보다는 질투가 더 느껴지는데.
▶질투를 의도하진 않았다. '천문'을 구상하면서 한글과 장영실을 어떻게 연결시킬까를 굉장히 고민했다. 역사적으로는 접점이 없으니깐. 그러다가 갑인자라는 놀라운 활자를 장영실이 만들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했다.
바로 그 장면의 앞이 편집돼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명나라 사신이 와서 세종이 영실을 걱정해 서운관에서 선공감으로 발령을 내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설명적이고 길어질 것 같아서 그 시퀀스를 통으로 편집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장영실의 수양딸이자 제자로 나온 사임(전여빈)은 편집이 많이 돼서 아쉬움이 많던데.
▶나 역시 아쉽다. 사임이란 캐릭터는 시나리오 후반 작업 때 구상했다. 영실 옆에 누군가 메신저로 있으면 좋을 거 샅았다. 영실처럼 관노이며 손재주가 좋은. 원래는 영실과 둘의 관계를 다룬 장면들이 많았다. 그런데 전체적인 플롯을 고민하다보니 결국은 죄다 편집됐다.
'천문'은 결국 세종과 영실의 이야기다. 세종과 신하들과의 긴장 속에는 영실이 놓여있다. 그런데 사임은 그런 긴장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사임의 이야기를 넣으면 넣을수록 전체 긴장감이 깨지더라.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 더욱 아쉽다.
마지막에 편집된 에필로그에 원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장영실을 데리고 사임이 시구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엔딩을 현재 버전으로 결정하면서 그 장면도 편집됐다.
-선공감 직인들이자 옥살이 3인방(김원해 윤제문 임원희)이 '천문'의 웃음 포인트를 담당하는데. 웃음을 주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긴장감을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편집할 때도 그런 지적이 있었다. 한창 긴장이 올라가는데 옥살이 3인방으로 긴장이 떨어진다고. 그런데 내가 그 장면을 좋아한다. 이 셋을 같이 찍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셋으로 삶이 보이고. 그리고 마지막에 곤장 80대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관객들에게 정보도 전해야 하고. 최민식이 맞을 때를 대비해 호흡 연습하는 장면도 이 사람이 세종이 아닌 자기를 생각하는 느낌도 주고 싶었다.
-명나라 사신과 장영실이 대립하는 장면은, 명 황제 대신인 사신에게 장영실이 너무 나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던데. 특히 오줌 장면은.
▶시나리오 때부터 어떻게 찍어야 할까 고민되던 부분이었다. 장영실 입장에선 죽을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다. 명나라에서 이용당하느니 죽겠다, 또 영실에겐 세종 없는 삶은 죽음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측우기도 보여주고 싶었다.
-음악이 고전적인데.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클래식하게 느껴지고. 조성우 음악감독과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 '덕혜옹주' 등을 같이 했는데.
▶조성우 음악감독은 요즘 많이 쓰이는 영화음악과는 좀 다르게 작업한다. 요즘 한국영화음악들은 멜로디를 많이 안쓰는데 조성우 음악감독은 멜로디를 깊게 쓴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매 신의 매 포인트마다 멜로디에 악기를 다르게 편성한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인데 덕분에 영화를 더 좋게 만들어줘서 감사하다.

-안여 장면은 스펙터클하게 구현할 수 있는 영화적인 장면이기도 한데.
▶안여 장면은 사실 내가 할 게 별로 없다. 촬영감독과 무술감독, 보조 출연자를 통제하는 조감독, 미술감독이 다 알아서 잘들 한 장면이다. 감독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사실 뒤집어지는 장면이 아니고 주저앉는 장면이었는데 뒤집어졌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었고 더 좋은 장면이 나왔다. 안여가 뒤집어지면서 망가지다 보니 현장에서 부랴부랴 고쳐서 다시 찍었다.
-국왕을 시해하려고 했다면 3족이 멸족돼야 했는데 영실은 곤장 80대를 맞는데.
▶최민식도 그 부분을 지적하더라. 관객이 그런 퀘스천을 가질 수 있다고. 그래서 저 놈이 실성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걸 더했다. 원래는 그게 엔딩이 아니고 뒷장면이 더 있었다.
곤장을 맞는 장면도 있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영실을 사임이 데리고 시구문으로 나가는 장면도 있었다. 그 뒤에 세종이 죽기 전에 별로 가면서 영실과 만나는 판타지 같은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찍기도 했다. 지금 버전의 마지막 대사인 "자네가 수고 많았네"는 원래 두 사람이 만나면서 세종이 영실에게 하는 대사였다. 그런데 마지막이 너무 판타지 갖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영화가 안 끝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지금 버전으로 끝냈다. "자네가 수고 많았네"라는 대사는 후시 때 대사가 아까우니 마지막으로 넣어보자는 제작자의 아이디어로 했는데 느낌이 좋아서 그대로 갔다.
-최근 들어 사극을 만들 때 영화적인 상상력에 대한 검열이 심해졌는데. 왜곡이라는 둥.
▶사극은 옛것을 빌어 현재를 이야기하는 장르다. 현재의 것에 대해 제약이 많으니 옛것을 빌어 대신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런데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나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배우들도 신경쓰고. 언제부터 이렇게 됐나란 생각도 든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이 정도의 영화적 상상력도 자기 검열을 해야 하나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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