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션들이 국내 최고의 베이스 연주자로 첫손에 꼽는 송홍섭이 15년 만에 발표한 앨범은 여백이 뚜렷하고 여유가 넘친다.
재킷에는 자신의 사진 한 장을 제외하면 그림 하나 없이 흰 바탕에 그저 검은색 글씨로 가사만 적혀있을 뿐이다. 가사도 화려한 수사가 없고 절묘한 비유도 없는 그저 쉽고 단순한 단어를 반복한다. 멜로디도 가사만큼이나 간결하고 노랫소리는 덤덤하다. 화려한 리듬과 시끄러운 사운드에 익숙한 이들은 오히려 신비롭기까지 할 정도로 단순하다.
"요즘 음악은 너무 꽉 채워서 들려준다"며 쓴웃음을 짓는 송홍섭은 단순한 리듬이 반복되면 듣는 사람은 즐거움과 편안함을 얻는다는 지론에 따라 사운드와 가사에 군더더기를 모두 뺐고 재킷에도 여백을 많이 뒀다.
“어떤 책을 보는데 거기에 ‘동양화는 궁극적으로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음악인생 35년의 이 노장이 보여주는 이 ‘여백’은 돈벌이를 위한 음악은 싫어 막노동을 했던 때와 음악에 빠져 심근경색과 급성 췌장염으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지난날들을 이겨낸 후 얻은 인생의 관조와 성찰이다.
열여섯에 처음 기타를 만졌던 송홍섭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70년대 당시 최고의 펑키밴드 사랑과 평화에 베이시스트로 활동했고, 80년대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리더로 발탁돼 80년대 조용필의 황금기를 함께 보냈다. 이후 전인권 김현식 한영애 이은미 등 당대 최고 가수들의 앨범을 제작하고 프로듀싱 했다. 또 국내 최초의 모던 록 밴드 삐삐밴드를 탄생시켰고, 90년대 명반으로 꼽히는 유엔미블루의 앨범을 제작했다.
그러나 송홍섭은 곧 큰 위기를 맞게 된다.
IMF를 맞아 자신의 음반사가 무너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지만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연주는 싫어 막노동을 택했다. 1년여 동안 전국 각지의 노동판을 돌다 다시 음악 프로듀서로 돌아왔지만 2002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하루 두 갑씩 피우던 담배와 잠을 자지 않고 작업하던 것이 원인이었다. 기적적으로 회복 후 2004년 봄여름가을겨울의 콘서트 밴드에 합류하게 됐지만 첫날 공연을 마친 후 다시 급성췌장염으로 쓰러져 또다시 사경을 헤맸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겪은 후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은 그에게 불사조란 뜻의 ‘더 피닉스’ 별칭을 붙여줬다. 앨범에 적힌 송홍섭의 이름은 그래서 ‘더 피닉스 송홍섭’이다.
다시 일어선 송홍섭은 그동안 뱉어 내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 지난 1992년 이후 15년 만에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속에 묵어 있던 것 빼내고 다시 시작하고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 프로듀싱 하느라 내 것에 충실하지 못했어요. 이제부터는 밀려있는 에너지를 그 때 그 때 빼내겠어요.”

송홍섭은 재킷 맨 뒷장에 ‘내가 너무 오만하여 나를 떠났던 음악에게 이 음반을…’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 글은 송홍섭이 열여섯에 처음 기타를 만진 이후 수많은 일을 겪은 후에 얻은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동안 내가 너무 자신감이 넘쳐 외도를 많이 했던 같아요. 제작도 하고 회사도 만들고 다 해봤는데 결국 내가 할 일은 아니었어요. 음악에 좀더 충실하라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송홍섭의 15년 에너지가 쏟아진 노래는 들을 수록 신비롭다. 5분 만에 가사를 쓴 ‘길’은 흥겨운 베이스 연주와 도덕경의 일부가 판소리 랩으로 담겨 있어 신선하다. 메마르고 담담한 그의 보컬이 잘 나타난 ‘날 두고 떠나가네’와 서정적인 가사와 독특한 베이스 기타 연주로 새로운 발라드의 경지를 보여주는 ‘떨리는 나의 입술에 닿던’은 송홍섭의 음악적 수준을 확인하게 해준다.
타이틀곡은 ‘바보’로 ‘바보 나는/나는 바보/바보 나는/나는 바보야/그대만을 사랑했어’가 하염없이 반복된다. 현재 스타일리스트로 활동중인 삐삐밴드 이윤정이 뮤직비디오를 구성했으며 노래만큼이나 미니멀하고 반복적이고 유치한 듯하지만 그 속에 묻어난 세련미가 돋보인다.
송홍섭은 지금 가요를 보면 서양음악의 그대로 인 것 같다며 편안한 웃음 속에서 조용한 어투로 나무란다.
“요즘은 노래로 사람을 감동시키기 보다는 보여지는 것이 발달돼 있어요. 나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아요. 요즘 대중음악은 만드는 기술을 뛰어난데 감동이 되어 내 가슴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저 음악이 듣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 눈감고 음악만 들어도 영상이 떠오르는데 요즘은 너무 노래가 영상에 의존하는 것 같아요.”
송홍섭은 인터뷰를 마치며 아무리 귀에 자극을 줘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꼭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진=박성기 기자 music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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