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박지성(33. PSV 에인트호번)이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경력에 마침표를 찍은 박지성은 축구를 통해 국민들에게 수많은 환희의 순간을 전해줬다. 이번 은퇴 선언을 통해 박지성이 그간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되짚고자 한다.
◆무명에 가까웠던 첫 시작
박지성은 세류초등학교 시절 차범근 축구상(5회)을 받으며 '유망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으로 인해 엘리트 선수가 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원공고 시절에는 박지성을 받아주려는 대학팀들이 없었다. 박지성은 결국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의 추천으로 간신히 명지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박지성은 명지대시절, 성실한 플레이와 강한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지만 신체조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팬들 역시 갓 스무 살이 된 박지성이 누군지 잘 몰랐다. 그러다보니 박지성이 시드니올림픽 축구대표팀에 발탁되자 못미더워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올림픽대표팀 출신이지만 프로팀들도 박지성을 외면했다.
하지만 박지성은 좌절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J2리그의 교토퍼플상가에서 자신의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소속 팀은 2부 리그였지만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으며 자신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성실함과 체력을 업그레이드했다. 노력을 멈추지 않은 그에게 마침내 희망이 찾아왔다.
◆축구인생의 변환점. 히딩크와의 만남과 2002년 한·일 월드컵
J2리그에서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던 박지성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준 히딩크 감독을 만나 2001년부터 국가대표로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히딩크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박지성은 국가대표 주전으로 출전하며 소속 팀과 국가대표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린 박지성은 월드컵을 앞둔 프랑스와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득점과 도움을 각각 기록하며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리고 대망의 2002년 6월. 박지성은 베스트 일레븐으로 조별예선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특히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전에서 나온 그의 왼발 슛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박지성이라는 이름을 팬들의 뇌리에 확실히 새겼다.
자신의 가치를 한껏 끌어올린 박지성은 소속팀 교토퍼플상가를 1부 리그로 승격시키고 사상 첫 일왕배 우승까지 이끌면서 유럽 진출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유럽진출. 아인트호벤에서 맨유까지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과 함께 히딩크 감독의 도움으로 박지성은 2002년 12월에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으로 진출하게 된다. 2년 전 세간의 평가와 비교해 본다면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아인트호벤 이적 후 1년 정도 적응 문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던 박지성이었지만 그의 근성은 서포터들의 비난을 환호로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인트호벤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던 박지성은 소속팀을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이끌며 최고의 팀이라던 AC밀란을 상대로 골까지 기록하며 유럽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박지성은 전 세계 축구팬들과 선수들에게 선망의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최고 명문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이적을 선언한다. 이적 당시에는 '유니폼 판매원이다'라는 비난도 숱하게 들었지만 한 시즌 정도 적응기간을 거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로테이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선수가 되었다.
이후 박지성은 맨유 소속에서 리그 우승과 함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을 거두며 전성기를 보낸다. 그리고 200경기 이상 맨유 소속으로 경기를 뛰며 클럽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맨유에서의 커리어를 끝낸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해 선수생활을 이어나갔지만 부상과 전술 문제로 인해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첫 유럽프로팀이었던 아인트호벤으로 임대 이적, 추락하던 팀을 구해내고 유로파리그 티켓을 선물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국가대표 캡틴. 리더십
유럽무대에서 뛰며 화려한 커리어를 만들어낸 박지성이었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장으로 팀을 잘 이끌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비록 조별예선에서 1승 1무 1패를 거두며 탈락했지만 박지성은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월드컵 이후 다양한 평가전에서도 박지성은 후배들을 이끌고 대한민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성장의 밑거름을 제공해줬으며,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이 원정 최초 16강 진출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는데도 앞장섰다.
국가대표 소속으로 뛰었던 마지막 대회, 2011년 아시안컵에서도 비록 일본과의 4강에서 접전 끝에 패배했지만 박지성은 팀의 앞선에 나서 후배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마지막 경기에서 100경기 출장을 달성하며 센츄리클럽에 가입하며 국가대표로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아쉬운 은퇴. 굿바이 캡틴
박지성은 지속적인 무릎 부상을 겪으면서도 소속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007년 4월 무릎 연골 재생 수술을 받고 9개월간 재활을 견디기도 했으며, 부상으로 정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퀸즈파크 레인저스에서는 연봉만 많이 받는 선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번 시즌 박지성은 아인트호벤으로 임대 이적하며 커리어를 이어나갈 것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박지성은 더 이상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견디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제 더 이상 축구 팬들은 정식 선수로서 박지성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에게 수많은 환희의 순간을 제공해준 박지성은 떠났지만 팬들은 캡틴으로서의 박지성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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