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여간 일본인들의 긁어모으거나 집착하는 성질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잡상노트'에 빼곡히 담긴 비행정에 대한 갖가지 단상과 스케치, '아톰'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로봇 애니메이션에 대한 '심오한' 이론서나 '방대한' 프라모델 카탈로그가 꽤나 수두룩한 나라가 일본이니까.
지난해 미국에서 먼저 개봉됐다가 오는 4월1일 국내 개봉하는 츠지 하츠키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유희왕'도 일본인 특유의 마니아 기질이 응축된 작품이다. 비록 선과 악의 분명한 대립구조라든지, 친구와의 우정의 절대적 강조,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어린 연령으로 볼 때 '어린이용' 작품이지만 말이다.
한편의 비주얼 카드게임 설명서
기본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카드게임의 어린 지존 유희(한국판 이름)가 고대 이집트로부터 내려온 '천년퍼즐'을 풀고, 이로 인해 선을 대표하는 파라오의 영혼이 빙의된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부활한 파라오의 적수 아누비스도 유희의 경쟁자 카이바에 빙의돼 결국 2대2 태그매치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칫 평면적이고 일상적인 카드게임에 그칠 수 있었던 이들의 대결이, 카드 그림의 주인공들이 사이버상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와 마법 대결로 업그레이드된다는 것. 어찌보면 사이버상의 이들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다.
결국 '유희왕'은 '듀얼 몬스터즈'라는 카드게임의 86분짜리 영상 게임설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0종 이상의 카드 중에 무작위로 40장의 카드로 패를 만들어, 카드에 쓰여진 공격력이나 수비력 등을 이용해 상대방의 점수를 빼앗는 이 게임의 '영상 교본'이라는 것. 그리고 이 교본이 무지하게 재미있다는 것.
마니아는 컬렉터다
그러면 이 작품은 왜 마니아용인가. 단언컨대 마니아는 컬렉터고, 이 작품은 나이를 불문하고 컬렉터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또한 마니아는 자기만의 꼼꼼한 시스템과 세계관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이 작품은 그런 시스템의 흥미로운 한 모델을 제시한다. 그것도 웬만한 상상력으로는 커버하기 힘든 스케일 큰 상상력의 진수성찬이다.
보자. '유희왕'에는 이름도 외우기 힘든 카드 속 갖가지 몬스터와 로봇, 마법사, 엘프가 등장한다. 유희의 카드패만 따져봐도 암흑기사 가이아, 엘프 검사, 마력의 광대 등 끝이 없다. 저마다 주특기와 필살기가 다르고, 카드 조합에 따라 공격력과 수비력도 달라지니 절대지존이란 건 없다. 절대지존이 없는 세계, 다시 말해 끝이 안보이는 세계는 마니아들의 도전욕을 자극한다. 그것이 끊임없는 카드 구입이든, 카드게임의 완벽한 숙지든..
여기에 '유희왕'은 그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전 원칙에 충실한다. 바로 아름답고 유려한 그리고 긴 합체장면과, 이 합체 때는 아무도 공격을 안한다는 일본 로봇 애니의 묵계. 몬스터 3마리가 층층이 엉겨붙어 초강력 몬스터로 변신하는 과정에 마니아들은 흥분한다.
'유희왕'과 '고스트 바둑왕'과 '드래곤볼'
'고스트 바둑왕'은 우리나라 프로 바둑기사들도 한번쯤은 읽어봤다는 일본 만화다. 그런데 '유희왕'의 주인공 유희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천년퍼즐'을 푸는 순간 5000년 전의 파라오가 부활한다는 설정이 묘하게도 이 '고스트 바둑왕'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초등학생 주인공 신도 히카루가 옛날 바둑판을 만난 순간 전설적 바둑기사 사이가 홀연히 나타난 것. 히카루와 사이가 2인1조가 돼 상대 원생과 기사를 제압하는 과정이나, 유희가 '어둠의 유희'(파라오)와 힘을 합쳐 상대방에 맞서는 과정이나 비슷하다. 결국 이 공통점은 만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인 특유의 애니미즘 정서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하나.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드래곤볼'의 후반부와 '유희왕'의 공통점도 흥미롭다. 잘 알려진대로 명랑소년만화로 기획됐던 '드래곤볼'이 점차 전투만화로 변질되면서 등장하는 게 공격력의 디지털화다. 고글을 쓰면 보이는 상대방의 공격지수. 물론 손오공 쪽이야 그냥 '기'로 알아채지만.
'유희왕'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래 카드에도 공격력과 수비력이 씌어져 있는데다, 몬스터들의 사이버상의 맞대결에서도 이 디지털화된 공격지수를 서로 맞비교해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공격력이 0이 되는 순간 게임은 끝나니까.
좀 오래된 만화이지만 '바벨2세'의 특이한 세계관도 이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바벨2세가 수족처럼 부리는 3대 몬스터(라고 불러도 될까) 포세이돈, 로프로스, 로뎀이 꼭 착한 짓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들이 적수이자 악의 상징인 요미의 텔레파시로도 조종될 수 있다는, 유년시절에 엄청난 충격을 줬던 이 세계관이 '유희왕'에서도 엿보인다. 스포일러 우려 때문에 밝힐 수는 없지만, 카이바가 사랑하는 카드의 몬스터 '푸른 눈의 백룡'이 속된 말로 유희를 위해 '한 건' 하니까.
끝으로 남는 의문
무지막지한 상상력과 화려한 그래픽으로 중무장한 '유희왕'. 그럼에도 원초적 의문은 지울 수 없다. 과연 이 작품은 스토리가 강조된 애니메이션인가, 카드 판매를 위한 영상 광고인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유희와 카이바인가, 아니면 카드 주인공인 푸른 눈의 백룡인가.
결국 '유희왕'은 요즘 유행하는 PPL의 상품들이 거꾸로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친구들과의 우정은 정말 소중하다는 메시지나, 선과 진리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교훈은 오히려 장식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푸른 눈의 백룡이 다시 부활해 사이버 세상을 넘어 현실에 등장할 때의 그 위용이란 가슴 벅찰 정도로 멋진 것을. 4월1일 개봉. 전체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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