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 말은 쉽지만, 타고 나야 하는 법이다. 노력, 말은 쉽지만, 버티는 것도 재능이다. 뚝심. 재능과 노력이 같이 있어야 붙들 수 있는 법이다.
재능과 노력과 뚝심을 겸비한 사람을 찾기란 그래서 쉽지 않다. 엄태화 감독(35). 재능, 노력, 뚝심의 가능성을 갖춘 신예다. 단편 '숲', 장편 '잉투기'로 독립영화계에선 일찍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 엄태화 감독은 첫 상업영화인 '가려진 시간'에서 흔치 않은 선택을 했다. 강하고, 명암 뚜렷한, 데뷔작을 찾기 보단, 선연한 감정이 도드라지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흥미롭다.
강동원을 주인공으로 쓰는 행운을 잡았지만, 열세살 소녀의 이야기로 풀었다. 그는 "원래 소녀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강동원이 들어온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강동원"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옮긴다.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 합니다.
-왜 '가려진 시간'을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선택했나.
▶'잉투기'도 그랬고, '숲'도 그랬고,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부딪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시간이 멈춘다는 설정은 원래 많지 않나.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 진짜 리얼하게 다가가면, 멈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 소녀와 성인 남자가 마주보는 그림을 봤다. 그 이미지와 이 설정을 가져다가 이야기를 만들었다.
-영화의 색 설계는 어떻게 했나. 크게 세 단락으로 빛의 설계가 다른데.
▶고락선 촬영감독님과 빛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고락선 촬영감독은 조명감독 출신이다) 그때 그때 정서를 촬영감독님과 같이 나누면서 찍었다. 빛의 설계는 고락선 촬영감독님의 공이다. 다만 후반작업을 할 때 시간이 멈춰진 세계 장면은, 같은 배경이지만 주인공의 정서와 감정에 맞춰 색을 미세하게 조정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강동원이 주인공인데, 강동원이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들을 활용하는 장면이 많지 않은데. 용감한 선택이지만 덜 상업적인 선택이기도 한데.
▶강동원이 물론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 이미지를 이용한다기보다는 이 영화 속 캐릭터인 성민으로 온전히 보여지길 바랬다. 강동원도 자기 이미지를 돋보이려 하지 않았고.
-'가려진 시간'에는 물의 이미지가 많은데. 섬이 배경이니, 바다는 물론이고 신비한 동굴 속 우물, 비, 멈춰진 물방울 등등.
▶내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나와 동갑내기인 가까운 친척이 물에서 사고로 먼저 갔다. 2009년이다. 그 때 이후로 영화에 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단편 때도 그랬고. 아무래도 내 무의식의 반영인 것 같다.
-물과 실종된 소년의 이야기,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온 이야기다 보니 아무래도 세월호가 떠오르는데. '가려진 시간'을 준비하던 기간이다보니 영향을 받았나.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도 연상되고.
▶시나리오를 쓸 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받았을 수 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연상될 수는 있지만 일부러 가져 오진 않았다. 모험을 떠난 세 소년이란 설정은 스필버그식의 전형적인 설정이다. 그래서 전형성을 갖고 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세상 사람 아무도 안 믿어줘도 한 소녀는 한 남자를 믿어준다는 이야기인데. 믿음이란 테마는 왜 잡았나.
▶이야기 쓰는 방식이 테마를 먼저 잡고 가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갖고 쓰고 나중에 테마를 잡는 편이다. 시나리오를 써 놓고 보니 전체를 묶어주는 테마가 믿음이란 생각이 들더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신으로 가득차 있기도 하고.
-소녀 이야기다. 실종됐다가 며칠 뒤 훌쩍 커서 돌아온 남자가 자기가 그 소년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믿어주는 소녀 이야기다. 타임슬립, 또는 타임루프 소재에선 대체로 남자가 주인공인데. 이게 '가려진 시간'의 특이점이자 한편으론 용감한 선택인데. 강동원이 남자 주인공이 됐다면, 남자 이야기로 바꿨을 수도 있는데. 그게 더 상업적일 수 있고.
▶원래부터 소녀 이야기였다. 그런 점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은 강동원이다. 원래 소녀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강동원이 들어왔다. 강동원은 본인이 메인이 아니더라도 이 이야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참여한 것이니 어찌 보면 가장 용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배경인 섬 이름이 화노도다.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나. 주인공들 이름도 그렇고.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준비하면서 일단 간단하게 먼저 이름을 만들자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노화가 되니깐, 거꾸로 해서 화노도라고 우선 만들었다. 나중에 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그대로 썼다. 수린은 시나리오 작가의 사촌동생 이름이고, 성민은 언젠가 이성민 선배와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
-가려진 시간이란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시나리오를 쓸 때는 멈춰진 시간이라는 게 스포일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멈춰진 시간이란 설정을 감추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게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었다. 다른 이름을 지으려고 스태프에게 공모를 하기도 했는데 결국 이걸로 갖다. 제목이 그래서 어렵다는 소리도 듣는다. 강동원이 유해진 선배와 '럭키' 응원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유해진 선배가 '가려진 시간' 이름을 잘 기억 못해서 "그래, 너도 '시간' 파이팅"이라고 했다더라.
-섬을 배경으로 한 건 탈출할 수 없는 곳이란 설정 때문이었을 테고. 제법 큰 섬으로 설정을 했는데.
▶일단 너무 좁은 섬이면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깐. 준비하면서 제주도와 거제도 같은 큰 섬들을 가봤다. 섬이 갖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개발로 많이 사라지고 있더라. 그래서 화노도에도 그런 느낌을 담고 싶었다. 터널 공사도 그 일환이었다.
-수린(신은수)의 그림자 장면을 반복해서 사용했는데.
▶첫번째 보육원에서 앞에서 그 그림자는 길다. 그 긴 그림자로 수린이가 스스로를 괴물처럼 생각하는 걸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두 번째 그림자는 짧다. 성민을 만나 평범한 아이, 남과 다르지 않은 아이라는 걸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강동원이 멈춰진 시간에 있는 장면들은 늘어진다. 전체 영화 톤앤매너와 달라서 그렇기도 할텐데. 친동생인 엄태구와 강동원이 함께 있는 그 시간 속에 더 사건, 사고를 넣고 더 유머를 넣을 법도 했을텐데.
▶그 지점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이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줄까도 했는데 그렇게 되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가 메인이 될 것 같더라. 이 영화의 목표가 그럼 바뀌게 된다. 그래서 정서에 더 집중하려 했다.
-소년들이 그곳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성적인 코드는 전혀 없는데.
▶고민을 했었다. 그런 장면을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 일 때문에 나중에 성민과 태식(엄태구)이 갈등을 겪는다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런데 결국 이 이야기는 수린이 머리 속에서 나올 법한 범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린의 상상 범위 안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성적인 코드는 다 지웠다.
-멈춰 있는 시간들을 찍기가 여간 어려웠을 텐데. 다른 장면들과 달리 카메라 무빙도 많고 원신원컷도 많은데.
▶80회차 중 20회차 정도가 그 장면이었다. 멈춰진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선 카메라 무빙이 많아야겠더라. 그냥 멈춰진 장면을 찍으면 스틸 같더라. 그 앞으로 카메라가 지나야 멈춘 세상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핸드핼드도 많다. 좀 더 다양하게 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정서에 맞추려면 지금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사람들이 멈춘 상태에서 찍었다. 공중에 멈춘 물체들은 소스를 먼저 찍고 합성했고. 블루매트에서도 찍었다. 아무래도 몹씬이 어려웠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움직이다가 멈춘 상태여야 했으니깐. 스스로 해봐도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춘 장면을 담는다는 게 쉽지 않더라. 뒤꿈치는 떨어져야 하고 팔과 다리는 반대여야 한다. 일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연출부와 모니터를 보면서 이상한 부분들을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한 명씩 찾아서 고쳐나가야 했다.
-그림 문자가 중요한 아이템으로 사용되는데.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 오리엔테이션에서 홍학순 감독님 강의가 있었다. 애니메이션 감독님이다. 이 분이 자기만의 그림 언어로 공책에 빼곡히 적어놓은 노트를 보여줬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가려진 시간'에 그림문자가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하니, 처음부터 그 분이 떠올랐다. 부탁을 드려서 그 분이 그림문자를 만들어줬다. 자음,모음을 일일이 그림으로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짧게 등장하는 그림문자들은 다 뜻과 그림이 일치하는 데 길게 등장하는 건 좀 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려진 시간'의 대표 이미지라면,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소녀와 성인 남자, 폐가 이미지, 그리고 수린이의 모습을 담은 비누조각들일텐데.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현실과 비현실이 부딪힐 때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폐가는 너무 판타지스럽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 바닥에 안 붙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외국에서 살다 왔던 누군가가 말년에 별장을 만들어서 공방으로 사용하다가 죽은 뒤 폐가가 됐다는 설정을 갖고 왔다. 미술감독님에게 그렇게 부탁드렸다. 테라스 부분도 그래야 외국 건물 같은 느낌도 날 것 같았고.
비누 조각은 사람이 심심할 때 뭘 하고 지낼까,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군대에서 비누조각을 만든다는 것이더라.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용 조각은, 네이버에서 본 이미지를 차용했다. 시나리오에선 비누를 모으는 장면도 넣었는데 나중에 뺐다.
-강동원은 감정으로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 많지 않아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고독의 감정이 그리 절절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또 사투리 억양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아이였을 적에 서울말을 쓰다가 어른이 된 다음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건, 적어도 이 영화에선 안 맞지 않나.
▶보는 사람에 따라선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난 강동원이 고독한 감정을 충분히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사투리는 촬영하면서 나 스스로 잘 못 느꼈다. 현장에서 사투리가 튀어 나온 건, 후시녹음을 하면서 잡기도 했고. 배우가 사투리를 쓰는 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색깔일 수도 있으니.
-수린 역을 맡은 신은수는 이번이 첫 연기인데. 처음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소화했는데.
▶오디션을 많이 봤다. 첫 번째 기준은 아역 특유의 '쪼'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신은수는 연기 경험이 없으니 그런 것도 없었다. 우선 이미지가 맞았다. 최종 오디션에 남은 몇몇과 연기 트레이닝을 시켰는데, 짧은 시간에 연기가 확확 늘더라. 이 정도면 영화를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현장에선 오히려 편했던 게 촬영에 들어가기 전 모든 장면 연기톤을 다 맞춰놨다. 연기 선생님 둘과 매일 4시간씩 연습을 했다. 중간중간 보면서 어떤 부분을 맞게 해달라고 주문했었다. 이 친구가 뛰어난 게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뛰어들어간다. 편집됐지만 새 아빠로 나온 김희원 선배와 경찰서에 갔다가 오는 장면에서 "배고프지"라고 묻는 장면을 찍었는데 실제로 신은수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왔다. 그러면서 "예"라고 바로 답했고. 김희원 선배가 동물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김희원은 아이를 지켜주는 어른 역할을 정말 훌륭하게 표현했는데. 대사나 설명 자체도 별로 없는데 제대로 만들어냈다. 보통 엄마가 죽고 새 아빠가 딸이란 산다는 설정이라면 성적인 착취 코드가 들어갈 법도 한데. 김희원의 악역 이미지가 있기에 그런 긴장감도 분명히 있고.
▶김희원 선배가 이 역할을 맡으면서 기존의 악역 이미지를 이용해 처음에는 묘한 긴장감을 주자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맙다"란 말을 듣도록 쌓는 관계도 중요했고. 아이도 성장하고 아빠도 성장하면서 만나는 장면이 있어야 했다. 원래는 더 무뚝뚝한 설정이었는데 희원 선배가 좀 더 귀여운 부분을 추가해서 입체적으로 만들어냈다.
-음악감독이 달파란인데. 음악감독으로 달파란의 특징 중 하나가 음악으로 장면을 전환하는 건데, '가려진 시간'에는 그런 음악들이 별로 없다. 음악으로 뉘앙스를 올리지도 않고. 시간이 멈췄으니 소리도 멈춘다는 설정을 갖고 왔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음악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면서 감정을 이끄는데.
▶성향이기도 한데, 음악으로 감정을 강요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중요할 때 감정을 우선적으로 느끼도록 하고 싶었고. 처음과 마지막 같은 테마를 사용했는데, 영화 구조와 맞도록 하고 싶기도 했다.
-문소리가 영화 시작과 끝을 이끄는 주요 배역으로 특별 출연했는데.
▶박찬욱-박찬경 감독님의 '파란만장' 조연출을 했을 때 문소리 선배님을 처음 만났다. 원래 문소리 선배님이 하려 했는데 임신을 해서, 이정현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 영화아카데미에서 '잉투기'를 준비할 때 첫 번째 멘토가 장준환 감독님이었다. 그러다보니 오며가며 문소리 선배님을 몇 번 뵀다. 이 역할은 처음부터 문소리 선배님을 염두에 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무게감 있는 배우가 맞아주길 바랬다. 그래서 손편지를 써서 부탁을 드렸다. 흔쾌히 오케이 해줬다.
-마지막에 신은수 얼굴로 클로즈업을 해서 끝날 법도 한데, 강동원 얼굴을 보여줬는데. 서비스 컷인가.
▶원래 콘티는 신은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이었다. 강동원이 돌아보는 장면이 없었다. 찍을 때 혹시 몰라서 분장도 하고 뒤돌아보는 장면을 찍었다. 그러면서 편집을 하는데, 어떤 감독이든 그 얼굴을 보면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 그리고 마지막 배 장면의 부감을 쓰려면 그 모습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늑대소년'이 끝까지 자기를 기다려주는 남자,라는 여성 판타지라면 '가려진 시간'은 끝까지 자기를 믿어주는 여자, 라는 남성 판타지인데.
▶그럴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 초등학교 시절 소녀를 보러 온 남자란 설정을 뒤집었다고 할 수 있으니깐.
-차기작은.
▶SF호러물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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