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뉴스가 ‘김재동의 레전드 드라마’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시대의 레전드들을 드라마로 읽는 연재물입니다. 전설로 남은 스포츠와 연예스타들의 삶속에 담긴 드라마틱한 석세스스토리를 드라마작법으로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기본적으로 인터뷰를 통해 레전드의 삶을 구축하는 다큐물이 되겠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드라마적 재미를 곁들여볼 예정입니다. 첫 회의 주인공은 지난 2000년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된 ‘짱구’ 장정구입니다. 1983년 WBC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15차 방어에 성공하고 타이틀을 자진 반납했던 장정구의 삶을 시작으로 ‘김재동의 레전드 드라마’ 막을 올립니다.[편집자 주]

'짱구일기'② - 아카시아 향기 속에 아버지는 떠나고..
S#1. 짱구방/ 밤
판자촌의 작은방이다. 어둠속에서 정구가 자고 있다. 옆에 깔린 이부자리는 비어있다.
자다 갑갑함을 느낀 정구 이불을 차내려 용을 쓴다. 하지만 이불이 커 잘 차내지지 않는다.
몇 번 용을 쓰던 정구 부스스 일어나 손으로 이불을 걷어낸다.
졸음겨운 눈으로 옆자리 돌아보면 형의 자리는 비어있다. 문득 마루쪽을 돌아보니 불이 켜져있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온다.
형(E)정구도 중학굘 보내야 될낀데예.
어머니(E)중핵교 월사금은 얼매나 한다드노?
형(E)잘 모르겠지만도 국민핵교보다야 안비싸겠심꺼?
어머니(E)그카겠제..참말로..지금 월사금도 마이 감픈데..
형(E)또 교복도 사야될끼고 가방도 사야될끼고..
어머니(E)돈 참 억수로 많이 들겄다. 그쟈?
형(E)휴우... 그렇겠지예. 하지만도 우째해서든 중핵교까진 보내야 안되겠심꺼?
정구(졸음에 겨워 목 긁으며 혼잣소리) 안갈낀데.. 내는 꼰투할낀데(하곤 도로 눕는다.)
형(E)너무 걱정 마소. 지도 벌고 아들도 버니께네 막둥이 하나 중핵교 못보내겠심꺼
어머니(E)니도 장가가야할끼고 아들도 지들 시집밑천 만들어야 될 낀데..정구 아부지, 우얄까예?
아버지(E)...
어머니(E)술 좀 고만 드시고 말쫌해보소 야?
아버지(E)내래 말 할 주제가 되믄 말을 했갔디..님자래 보기에 내래 말할 주제가 되간? 미안해 야. 님자한테도 애들한테도 다 미안해..근데 어카갔어? 내래 요 주제밖에 안돼는거를... 날래 술잔이나 내노라우...
방안의 정구는 어느새 네활개를 펼치고 ‘고로롱 고로롱’ 잠이 들어있다.
S#2. 골목길
5월의 저녁무렵이다. 꼬맹이 친구가 손바닥을 미트처럼 대고 있으면 정구 복서처럼 원투, 원투, 원투 쓰리, 원투 쓰리 입으로 카운트하며 쳐댄다. 친구 손바닥이 아파 점점 울상이 되고 이내 두손을 가랑이 사이에 비비고 물러난다.
정구그기 아프나? 살살쳤는데.
친구1니가 받아봐라. 안아픈가.
정구(손바닥 내밀며) 그래. 니도 함 해봐
친구1(매운맛 좀 봐라는 심사로 주먹을 꽉 쥔 채 손을 뻗는다) 원 투 원투 원투 원투 쓰리 원투 쓰리
하지만 정구는 타격 시 손바닥을 살짝살짝 빼며 주먹을 받는다. 그러다 손을 휙 하고 휘두르면 친구의 머리에 맞는다.
친구아야. 와 때리는데?
정구때린게 아이다. 꼰투할 때 보믄 다 이렇게 한다.
친구근데 와 내한테는 손바닥만 대라캤노?
정구니가 아는줄 알았지.
친구인자 내가 받을란다. 니 해봐
정구그래(하는데)
친구2짱구야 니 아부지 오신다.
아이들 보면 저만치 아래서부터 이미 얼큰하게 취한 채 올라오는 아버지가 보인다.
친구들짱구야 우린 가께.
정구쪼매있다 놀이터서 만나재이.
친구들그래.
친구들 보내고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정구아부지, 다녀오셨십니꺼
아버지기래. 짱구 우리 막둥이.(하며 휘청인다)
정구아부지 많이 취하셨네예(하고 부축해 집으로 향한다)
S#3. 정구집
아버지 마루에 누워있고 부엌에서부터 정구 물 한 그릇 떠 나온다.
정구아부지요. 여 물드이소.
아버지(힘들게 일어나 앉아 물을 받아마신다) 우리 막둥이가 떠주니께네 물이 달고만 기래
정구(기분 좋아 헤-하며 뒷머릴 긁는다.)
아버지(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정구야
정구야.
아버지니 중학교래 안가고 싶니?
정구어데예. 지는 꼰투할낀데예.
아버지기래? 꼰투해 뭐할거이네?
정구지는 챔피언 될낍니더.
아버지챔피언.. 기래 그것도 좋갔구만 그래.. 정구야!
정구야
아버지이 아바디가 미안해!
정구뭐가예?
아버지이거이 저거이 다... 다 미안해
정구(첨 들어보는 소리에 어색하다) 아, 아입니더..
아버지아이야 아이야 미안해. 이 아바디가 미안한기야. 미안한거이 맞아 야.
정구(아무래도 어색해서) 저..아부지요.. 지 쪼매 놀다올라카는데예.
아버지뭐이?
정구쪼매 놀다 오믄 안되겠심꺼?
아버지기래 놀아야디. 와 안되갔어. 기래 신나게 뛰놀다 오라우.
정구야. 다녀오겠심니더(하고는 신이 나 뛰어나간다)
아버지(그 모습 애잔하게 보다 울컥 토한다.)
마루를 내려와 마당에 엎드린 채로 울컥울컥 토하는 모습에서.
S#4. 놀이터
아까의 친구들과 복싱연습하며 놀고 있는 짱구. 미트 잡이 역을 하는 친구가 기습적으로 손을 휘둘러보지만 더킹으로 잘 피해낸다.
친구1(약올라 손 내리며) 안해 씨이
정구와?
친구1내는 맞는데 니는 왜 안맞는데?
정구원래 안맞는기다. 피하라꼬 하는 연습이제, 맞으라꼬 하나?
친구1(친구2보며) 인자 니가 해라. 내는 고마 안할끼다.
친구2(한곳 바라보며) 짱구야 저기 저 니 행님이랑 아부지 아이가?
짱구와 친구1 돌아보면 내리막 골목한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누군가를 업고 서두르는 기색이다.
정구울아부진 술 먹고 잔다. 행님은 공장서 아즉 올 때 안됐다.
친구2(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데.. 꼭 니 행님같은데.
친구1니 맞기 싫어서 그라제. 빨리 손대라. 얼릉!
친구2 미트 대듯 손 내밀면 정구 원투 원투 제법 폼 나게 주먹을 내민다. 석양빛 아래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고즈넉하다.
의사(E)이미 늦었심더. 모시고 가이소.
S#5. 병원
정구형늦다니요? 아침에 멀쩡히 나가셨던 양반임니더. 뭔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교?
의사(사무적이다) 술 한잔 드시고 머리를 어데 쎄게 부닥치신 모양인데..바로 그때 치료를 했어야 할낀데.. 이렇게 한참 지나서 오시믄 우예 손쓸 방도가 없는 기라예. 그카고 우리 병원엔 머리 찍고카는 기계도 엄꼬...
정구형(사정조로) 아니 그캐도 먼 방도가 있을낀디예..
의사(답답하다) 하아, 참말로.. 그 방도가 뭔지 좀 갈카주소..내도 사람 살리는 의산데 방도가 있으먼 백번이라도 살리제.
정구형 말문이 막힌다.
S#6. 짱구집/ 밤
신이 난 짱구 폴짝거리며 들어선다.
정구댕기왔심더.
집이 조용하다. 안방에 불이 켜져 있고 댓돌엔 온가족 신발들이 다 모여 있다. 신발 팽개치듯 벗고 올라서며
정구어무이, 누부야 밥묵자
S#7. 안방/밤
짱구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누워있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누이 셋과 어머니, 큰 형이 심각하게 앉아있다.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어머니와 누이 셋은 소리죽여 훌쩍이고 있다.
짱구 분위기에 주눅 들어 막내 누이 옆에 쭈그려 앉아 아버지를 본다.
정구모(울음 담긴 목소리로) 정구야!
정구야
정구모건넌방에 상봐놨으께네 밥이나 퍼다 먹으래이.
정구야. (쭈뼛쭈뼛 일어나는데)
정구형밥묵고.. 어데 끄대나가지말고 집에 얌전히 있그래이.. 아부지가 이상하니께네.
정구야. (쭈뼛거리며 방 나선다)
S#8. 건넌방/ 밤
밥상이 차려지다 만 채로 있다. 더러는 수저도 방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 밥상을 차리다말고 놀라고 서둔 흔적으로 남아있다.
방문이 열리면 밥그릇을 들고 정구가 들어온다. 상에 앉는 정구, 반찬을 보다 안색이 환해진다. 상엔 고등어 자반이 올라있다. 방바닥의 수저를 집어들고 밥을 먹으려다 안방 쪽을 한번 쭈뼛 돌아보는 정구. 하지만 이내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며 밥을 먹는다.
(시간경과)
고등어 뼈만 남은 접시와 싹싹 비워진 정구의 밥그릇등이 남아있고 한귀퉁이서 정구 고로롱고로롱 잠들어있다.
방문이 열리며 정구형이 들어온다. 정구형, 정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조용히 깨운다. 열일곱살 차이나는 동생은 아들 같기도 하다.
정구형정구야! 정구야! 일나라!
정구(간신히 누워 눈만 떠 본다)
정구형어여 일나라. 아부지 이상하시다. 퍼뜩 인나.
S# 9. 안방
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이 떠진다.
정구형(달려들며) 아부지, 아부지요. 정신드십니꺼.
가족 모두가 아버지 얼굴 쪽으로 얼굴들을 들이밀고 정구도 덩달아 아버지를 바라본다.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가 가족들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며 눈을 맞춘다. 이윽고 정구와도 눈을 맞추고는 거센 숨을 멈추고 안도한듯 눈을 감는다.
정구모정구아부지. 정구아부지요. 숨 좀 쉬소. 야? 눈 좀 떠 보소! 정구아부지~
어머니가 끝내 오열을 터뜨리고 형과 누이들 모두 통곡한다.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정구 이내 삐죽삐죽 눈물이 삐져나오더니 “아부지, 아부지”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S#10. 몽타쥬
정구(N)내 나이 열두 살. 아버진 그렇게 돌아가셨다.
1. 정구집 마당- 마루에 영정과 위패 모셔져있고 건을 쓴 정구 형이 비슷비슷한 처지의 동네사람들 문상을 받고 있다. 좁은 마당엔 멍석이 깔리고 문상객들이 음식을 껴 앉아 먹고 있다. 그 사이를 상복 입은 정구의 누나 셋이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음식을 나르는 등 수발을 들고 있고.
정구(N)아카시아향이 내 작은 세계 아미동을 온통 휘젓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2. 골목 한 켠- 흘러내리는 건을 쓰고 커다란 삼베상복을 입은 정구가 쪼그리고 앉아 저만치 집 쪽을 바라본다. 근조 등이 내걸린 집 마당에선 어른들의 웃음과 악다구니 등이 건너온다. 상 치르는 일은 온전히 어른들의 일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에 무의미한 낙서를 하는 정구. 그 눈앞으로 들이밀어지는 하얀 아카시아 꽃송이. 정구 고개를 들어보면 갑배와 동네 친구들. 아이들은 딴에 심각한 표정으로 아카시아 꽃을 먹고 있다. 아카시아 꽃을 본 정구가 웃으며 그걸 받아 꽃잎을 따먹자 아이들도 짐짓 엄숙했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에겐 아이들다운 부조와 위로가 있었다. 그 위로 정구 나레이션 이어진다.
정구(N)죽음이란 것. 다시는 못 본다는 것. 다시는 못 듣고 못 말하고 다시는 못 만진다는 것. 그래서 기억만을 되씹고 곱씹을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을 알기엔 어렸다.
3. 마당- 한가운데 소주박스가 놓여있다. 뒤꼍에서부터 나서는 어머니 손에 소주 빈병이 몇 병 들려있다. 박스에 꽂히는 소주병. 다시 부엌으로부터 나서는 어머니 손에 다시 소주 빈병 몇 병 박스에 꽂히고.. 안방으로부터 나서 댓돌을 내려오는 어머니의 손에도 소주병이... 들고 나온 소주병 중 한 병이 반쯤 남아있다. 어머니 그냥 박스에 꽂으려다 말고 박스 앞에 쪼그려 앉아 뚜껑을 튕겨내고 김빠진 소주를 들이킨다. 고개를 젖혀 소주를 넘기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구른다. 그런 모습을 괜히 주눅 들어 문밖에서 빼꼼 바라보는 정구.
정구(N)이북에서 피난오셨다는 내 늙은 아버지는 언제나 술과 함께셨다. 어머니로부터도, 형으로부터도 아버지의 사연을 전해들은 바는 없다. 내 기억 속에 언제나 술을 드시고 계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치워지는 소주병들처럼 내 기억에서 퇴장해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집안 분위기만이 오래도록 답답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내 나이 열두 살. 그해 늦은 봄 아미동엔 아카시아 향기가 극성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