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소지 마립간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송경흡 작가의 말
10여년 전 나는 KBS의 역사 다큐에 아트디렉터로 참여했었다.
'횡금기사의 성'이라는 이 역사다큐는 '신라'의 성장과정과 그 배경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물량이 투입된 대작이었다.
당시 신라의 기마무사들에 대한 재현에 고심하던 나는 오래전 도예과 출신이었던 나의 전공을 살려 실제 신라 '황금기사단'의 모습을 테라코타 형식의 도자인형으로 재현하기로 했다.
나의 장군상 작업의 첫 시작이었다.
신라의 중흥기를 만든 내물마립간과 각종 인프라를 구축해 통일의 발판을 만든 소지마립간, 그리고 여성임에도 특출한 리더십으로 강대국의 면모를 구축했던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나는 10여기의 신라 테라코타 도자인형을 만들어 촬영했고 다큐멘터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도예과 졸업 후 20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테라코타 작업에 전념하게 되고 본격적인 장군상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직업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는 마치 잠들어있던 세포가 깨어나듯 장군상 작업에 몰입했고 졸업이후 나의 길이 아닌 줄 알았던 작가로서의 첫 번째 전시회까지 열게 되었다. 신라황금기사단은 고구려 개마무사, 고려의 중기갑병, 그리고 삼국지 영웅전으로 이어지며 나의 장군상 시리즈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지마립간은 '내물마립간'이나 '눌지 마립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이다. 그는 '내물마립간'의 직계로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김씨' 가문의 적통을 계승해 다양한 정책과 아이디어로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 토대와 유산은 후일 김춘추와 김유신에에 이르러 만개했고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던 것이다.

소지마립간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9~500년이고, 자비마립간의 장자로 왕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효행을 지녔으며 겸손하고 공손해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고 한다. 기간 도로를 수리하고 수도에 시장을 열어 물화를 유통하게 했으며 전국적 연락망을 갖추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의 침략을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가야와 연합해 막아냈고, 병사 위문과 민심 수습을 위해 지방 순행에 나서기도 했다. 백제 동성왕과는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변경지방 요충지의 성을 개축하거나 증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사서에서의 소지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소지마립간을 중요한 인물로 다뤘다. 즉위에서 사망까지 기록할 정도로 기록했다. 삼국사기 제3권은 내물 이사금부터 시작하여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다.
소지마립간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각 하나씩 두 가지의 일화를 남겼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오기일(烏忌日)'과 관련된 '사금갑 설화'이고 또 하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처녀 '벽화'와의 이야기다.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 이야기
'사금갑'은 거문고 보관을 위해 사용되는 통을 (활로)쏘라는 뜻이다.
무진년(488년)에 마립간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소지 마립간이 기사(騎士 말을 탄 전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는데, 기사는 남쪽의 피촌(避村)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옆에 있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기사에게 글(족자)을 주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그냥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며 글을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일관이 "두 사람은 서민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왕이 열어 보니,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 세글자가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 왕이 하사하는 궁의 주인으로 전대왕비 현왕비로 볼 수 있다) 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왕 모르게 거문고 갑 안에 숨어서 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이후 신라에서는 정월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약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신라에서는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서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다.

삼국사기 '벽화' 이야기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500년) 9월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했는데 날이군의 토호 '파로'가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비단으로 덮은 후 들것에 태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줄 알고 열어보니 어린 여자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리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왕은 궁궐에 돌아와서도 벽화를 잊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백성으로 위장해 몇 차례에 걸쳐 벽화를 만나러 갔다. 어느날 여정 중 이름모를 할머니가 사는 집에 묵게 되었는데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소지마립간은 할머니에게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지를 묻자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며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이라고 충고하였다. 왕은 할머니의 말에 부끄럽게 여겼지만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