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대당총관 천존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작가의 말
천존은 김유신, 죽지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신라의 장군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접한 곳은 오랜 국산 게임 '천녀의 신화'라는 삼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였다. 게임 속 '천존'은 신라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 은신술을 쓰는 케릭터였다... 그렇게 게임 속에서 천존을 처음 만났다. 훗날 나는 그를 '신라 황금 기사단'의 일원으로 테라코타 작품으로 부활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외에는 그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라의 장수였다. '김천존'이라고도 불리는 천존은 무명의 장수가 아니며 역사속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그는 '김인문'과 함께 당에 파견된 신라 동맹단의 리더였고, 평생을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터에서 보낸 백전노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구려가 당의 공격에 멸망할 즈음, '대당 총관'에 임명되어 훗날 치러질 당에 대한 일전에 대비했다. 그리고 '죽지'와 함께 '당(唐)'이 '웅진'에 세운 괴뢰정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수많은 당군을 죽이고 그 땅을 회복하였다.
비록 게임 속 캐릭터로 처음 접했지만 그는 나의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실제 역사 속의 '용장'이었다. 당으로부터 신라의 주권을 지켜내고 훗날 통일신라의 발전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천존과 같은 이름 없는 신라 장수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김유신'이란 이름에 가려졌지만 천존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장군으로 기억될 만 하다.

천존은
삼국통일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문헌기록에서 주로 천존으로 기록되어 '천존'으로만 나오는 탓에 성이 천이고 이름이 존으로써 외자 이름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김씨 성의 '김천존'이 본명이다.
7세기 중반 삼국통일전쟁에서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 죽지 등과 함께 많은 굵직한 전투에 출전한 역전의 용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679년 중시가 됐는데, 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천존 본인의 열전이나 그를 기준으로 소개된 기록이 없어 그의 행적은 파편적으로 알 수 있는데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649년이다.
백제 장군 은상이 정예병 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石吐)를 비롯한 7개 성을 공격 했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 죽지, 진춘, 천존 등의 장군에게 이를 막게 했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신라는 3군을 다섯 갈래의 길로 나눠 공격했는데, 서로 이기고 지고 치열하게 싸워 열흘이 지나도록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신라군은 도살성(道薩城)에서 주둔하며 휴식을 취했는데 이 때 백제인 스파이가 잠입하는 것을 예상해 원군이 온다는 역정보를 흘려 은상을 조급하게 만들고 결국 승리했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투에 무열왕, 김유신, 진주 등과 함께 참여했다.
천존은 백제 멸망 후에도 그 영토에 머물며 백제 부흥군과 전투를 계속했다. 661년 복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두량윤성(豆良尹城)에서 김품일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패퇴시키자 천존, 죽지 등이 구원하였다. 이밖에도 661년 7월 17일,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출전하고 663년 2월에는 백제부흥군의 거열성(居列城). 거물성(居勿城). 소평성(沙平城), 덕안성(德安城) 등을 함락시켰다. 663년 8월 전투에도 참가했다.
667년 시작된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668년 여름쯤 사실상 고구려의 패배 분위기로 넘어가자 천존은 대당총관으로 참여했다. 670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천존과 죽지가 이끄는 신라군이 웅진도독부를 기습공격해 7개 성을 빼앗았다.

사서에서의 천존
'삼국유사'에서는 천존의 일화를 전한다. 670년 이 때 당나라 수군이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황해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승려 의상이 전했다. 문무왕은 방어할 대책을 논의했고, 천존이 도술을 하는 명랑법사(明朗法師)를 천거했다. 명랑은 도술로 폭풍을 일으켜 당의 수군을 2차례에 걸쳐 침몰시켰다. 천존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가늠하게 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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