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건의 뼈아픈 착각....신화는 뒷골목에 없다

초월적인 능력의 이면에 인간의 고뇌를 투영하는 것은 현대 슈퍼히어로물이 진화해 온 방식이다. 동질감을 위한 친숙한 전략이었지만, 그 시도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영웅의 신화적 품격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원칙이다.
제임스 건이 이끄는 DC 스튜디오에서 새롭게 내놓은 ‘슈퍼걸’은 이 원칙을 깨면 어떤 참담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초인적 고독은 온데간데없고, 이 영화는 제임스 건 특유의 냉소가 흘러넘치는 소동극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하는 부분은 앞서 언급한 ‘광활한 우주’라는 단어와 대비되는 ‘공간의 폐쇄성’이다. 원작 속 슈퍼걸, 카라 조-엘은 DC 유니버스에서 지구가 아닌 우주적 스케일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슈퍼걸은 은하계의 가장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 외계인들이 타액을 흘리며 배회하는 술집, 온갖 잡범들이 득실거리는 하수구 같은 공간에만 머무른다. 여기에 노란 태양, 붉은 태양, 초록색 태양 등의 권역을 설정해 슈퍼걸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킨다. 그와 대적하는 빌런의 능력이나 전략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인 자연 환경에 의해 슈퍼걸의 유불리가 결정된다. 때문에 빌런의 서사에도, 슈퍼걸의 서사에도 매력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불필요한 지저분함과 공간의 지속적인 어두움이 관객들의 숨을 막히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슈퍼걸 역을 맡은 주연 밀리 앨콕의 캐릭터 해석이 극을 파국으로 이끈다. 극 중 카라는 고향 아르고를 잃은 상실감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 상황을 술독에 빠진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풀어낸다. 일부러 자신이 다치면 피가 나고, 맞으면 고통을 느끼는 행성에 머무를 정도다.
하지만 왜 그가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에 대한 서사적 설득력이 부족하다. 가족과 고향을 잃은 슬픔을 그저 ‘화가 난다’는 감정으로 치환하고, 시니컬한 냉소와 반항으로 풀어낸다. 안일하기 짝이 없다.

이 안일한 행보가 밀리 앨콕의 슈퍼걸에 고개를 내젓게 한다. 슈퍼걸에 대한 연민보다 “왜 행동 하나하나 저리 못난 짓만 하는가”라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와중에 심지어 밀리 앨콕의 슈퍼걸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점도 문제다. 즉, 액션의 빈곤을 지적하고 싶다.
슈퍼히어로물에서 액션은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자신의 존재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언어로 봐야 한다. 손바닥에서 리펄서건이 나오는 아이언맨, 빌런에게 거미줄을 쏘아 제압하는 스파이더맨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슈퍼걸’의 액션 시퀀스에는 아무 맛이 없다. 물론, 슈퍼걸이 ‘맨 오브 스틸’에서 헨리 카빌이 보여준 압도적이고 비장미 넘쳤던 액션에 닿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은 없다. 미국 CBS에서 방송된 TV 시리즈 ‘슈퍼걸’이 보여준 액션의 짜임새조차 따라가지 못한 것이 충격이다. 적어도 TV 시리즈는 슈퍼걸의 매력 덕분에 조잡한 CG와 유치한 액션마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어디일까.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DC에 입히려 한 제임스 건의 오만함 때문이다. 밑바닥 인생을 살던 루저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담은 ‘가오갤’ 시리즈에는 시니컬한 유머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하지만 DC, 특히 ‘슈퍼맨’, ‘슈퍼걸’은 이미 신화의 영역에 들어선 서사다. 그들을 B급 스페이스 오페라의 틀에 구겨 넣는 순간, 캐릭터는 고유의 빛을 잃는다.
우리가 슈퍼걸을 소비하는 이유, 그리고 슈퍼히어로물을 보러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슈퍼히어로에게서 슈퍼히어로 같은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명제다. 제임스 건의 DC 스튜디오는 이 ‘기본’을 지키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무려 108분의 러닝타임 동안 슈퍼걸에게서 ‘슈퍼히어로다움’을 볼 수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도.
영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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