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극장서 봐야 한다는 이유를 재확인시켜주는 걸작

최근 ‘마티 슈프림’ ‘호프’의 개봉으로 극장에서 영화 보는 맛이 난다.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에 정점을 찍을 영화가 온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놀란은 ‘다크 나이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오펜하이머’ 등을 만들며 지금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으로 손꼽힌다. 그런 그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안 볼 재간이 있나? 영화를 본 감상 역시 명불허전. 놀란은 놀란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문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의 10년에 걸친 귀향담으로, 인간이 겪는 내적 성장과 정체성의 과정을 형상화하며 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재미나게도 놀란은 ‘일리아스’를 영화화한 2004년작 ‘트로이’의 연출을 맡을 뻔했다가 무산된 경험이 있다.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그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를 영화로 만들 운명이었던 셈이다.
영화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도 8년이 흐른 시점으로 시작한다. 전쟁을 성공시킨 주역이자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여전히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이타카 왕궁은 왕비 페넬로페(앤 해세웨이)와 결혼해 왕좌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로 점령당한 상황. 신들의 분노를 산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폭풍과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운명의 시련을 겪으며 귀환 중이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는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헤맨다. 오디세우스와 이타카의 상황, 과거 트로이 전쟁의 순간 등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원작의 구조를 놀란 특유의 비선형적 서사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건 오디세우스를 고난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흔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와 마녀 키르케, 거인족 군단, 님프 세이렌과 칼립소 등 귀환을 방해하는 존재들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비춘다. 속출하는 희생 끝에 결국 홀로 남아 기억을 잃은 채 칼립소의 섬에 묶여 있으면서도 그리운 무언가를 갈망하는 오디세우스의 멍한 표정.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승리가 아닌 한 문명을 학살한 순간임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괴로워하는 오디세우스의 표정에서 놀란이 관객들에게 보내고 싶은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무고한 이들이 무자비하게 죽어 나가는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지금 시대에 보내는 강력한 반전(反戰)의 메시지.
맷 데이먼의 섬세한 연기는 영화의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훌륭한 요소로 작용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션’ ‘인터스텔라’ 등의 전작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아이콘이 된 맷 데이먼이 귀환을 갈망하면서도 온갖 복잡다단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오디세우스를 새로이 선보이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늙고 지친 거지 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주인을 기다리며 생을 지켜온 늙은 개 아르고스와 상봉하는 장면도 짧지만 코끝을 찡하게 만들고. 인내하는 정숙한 여인의 표상으로 알려진 페넬로페의 재해석도 눈에 띈다.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내지르는 일성에선, 앤 해세웨이의 단단한 연기가 뒷받침되며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그 외 배우진의 면면도 여운을 남긴다. 무례한 구혼자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안티노오스로 분한 로버트 패틴슨의 비열한 얼굴이 기억에 남고, 오디세우스의 충성스러운 시종 에우마이오를 연기한 존 레귀자모, 아테나 여신 역의 젠데이아와 칼립소 역의 샤를리즈 테론도 반가운 얼굴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마녀 키르케 역의 사만다 모튼. 남자들의 얼굴을 악력으로 짓이기며 돼지로 만드는 기괴한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장면으로 훔쳐낸다.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벗은 톰 홀랜드는 평이하다.

루피타 뇽과 엘리엇 페이지의 캐스팅 논란은 영화를 보면 사그라들 것이다. 세계관 최고 미녀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네를 흑인 배우 루피타 뇽으로, 원작에 없는 인물이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병사 시논 역에 트랜스젠더 배우 엘리엇 페이지를 캐스팅하며 원작 고증 훼손 및 ‘과도한 PC주의’라는 논란을 산 것인데, 우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자체가 신화를 다룬 작품이란 점에서 고증 논란이 무의미하다는 걸 기억하자. 루피타 뇽과 엘리엇 페이지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을 떠올릴 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도 논란을 잠재우는 부분.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보다 영화 자체를 체험하는 묘미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10년에 걸친 인간의 귀환을 다루는 원작 자체가 대서사시인 만큼 영화가 장대한 것은 당연지사. 러닝타임 172분이라는 진입장벽이 있지만, 3시간 가까운 그 시간은 영화가 펼쳐내는 압도적인 영상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미국 등 세계 곳곳의 경이로운 자연을 찾아 완성한 로케이션 촬영,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이 탑승하는 배와 높이 10.7m에 달하는 거대한 트로이 목마를 실제로 제작하는 등 거대한 스케일로 구현한 신화 속 판타지 세계의 생생한 비주얼이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편을 아이맥스 필름 포맷으로 촬영한 ‘오디세이’는, 꼭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관람해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화면 비율 1.43대 1인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관람하면 장엄한 자연과 운명의 위엄, 그리고 그 앞에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 인간의 먹먹함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다. 화면 비율 2.39대 1인 일반 상영관에서 본다면 잘려 나갈 화면이 너무 많다. 물론 이야기의 흐름을 쫓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오디세이’는 화면이 보여주는 영상미에 온전히 압도되어 감정을 경험해야 하는 영화인 만큼 아이맥스 상영관을 강력히 추천한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배 위에 올라타 포세이돈의 분노를 체감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오롯이 느껴질 것이다. 이미 영화가 개봉한 해외에선 ‘오디세이’의 영상미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아이맥스 70mm 필름 영사 시설을 갖춘 전 세계 41개 극장을 찾아 떠나는 관객들의 오디세이가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
‘오디세이’는 개봉 2주 만에 글로벌 박스오피스 누적 수입 6억396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2억5000만 달러의 제작비의 손익분기점을 넘은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 국가 개봉 전이라 10억 달러 클럽 입성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서양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후의 고전을 영화로 만들었다. 8월 5일 개봉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갈 이유로 충분하다.
정수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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