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정도까지였을까.
오는 19일 개봉을 앞둔 '남극일기'(제작 싸이더스픽쳐스)의 임필성 감독(33)이 촬영도중 틈틈이 썼던 '감독일기'를 공개했다. 자화자찬, 업적 나열형이 결코 아니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현장 총책임자로서 감독이 겪어야 했던 고민과 고통, 좌절과 극복이 스피드한 문체에 담겼다.
스크린에서는 절대 확인할 수 없는 외국인 스태프와의 갈등과 봉합, 송강호 유지태 윤제문 박희순 등 출연배우들의 열정과 자기관리 노력, 봉준호 김지운 등 동료 감독들의 성원과 걱정..총제작비 85억원이 투입된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임필성 감독은 스트레스성 당뇨까지 걸렸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비단 '남극일기'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영화는 어느 한 사람의 몫이 아닌, 감독과 스태프, 배우 모두의 합작품이다. 저마다의 '도달불능점'을 향해 묵묵히 걷는 모든 이들의 땀방울이 오늘도 한국영화를 이끌어간다. 다음은 임필성 감독의 '감독일기'(Director's Journal)에서 발췌한 내용.
2004년 5월30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어..이건 아닌데.." 암담했다. 처음 사흘간 찍어놓았던 장면들 중에서, 연기자에게 감정을 잘못 전달한 부분들이 눈에 띈 것이다. 5년의 기다림 끝에 부른 '액션!'에 흥분했기 때문일까.
완벽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진 마음 약해져선 안 된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일 것이다.

6월25일 마운틴 라이포드
이곳은 '올드보이'의 라스트 신을 촬영했던 바로 그 '설산'이지만,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풍경을 찾기 힘들다. 있다 해도 한참을 산자락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은(뉴질랜드 스태프) 여러 여건상 어렵다며 다른 옵션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꽤나 완강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본다. 그렇다. 이들은 한국 스태프가 아닌 것이다.
역시 당황했을 정정훈 촬영감독이 침착하지만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 찍는데 뉴질랜드 방식, 한국방식 이런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 우리는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기 모인 게 아니냐?"
이 말에 몇몇 키위(뉴질랜드인)들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아닌가. 그들은 지금까지의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한국과 뉴질랜드 메인 스태프는 처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돼 맥주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진다. 뉴질랜드 라인PD인 브리짓이 내게 와 귓속말을 한다. "필~! 이젠 우리는 하나가 된 거야."
7월28일 스노우 팜
절망했다. 그들이(뉴질랜드 스태프) 한국쪽 스태프와 합의하지 않은 채 (눈폭풍 위험을 이유로) 신성한 카메라를 들고 대피한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브리짓에게 롤프(뉴질랜드 스태프 철수를 지시한 안전요원)의 공식적인 사과와 해명 없이는 남은 기간 그와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사태는 롤프의 공식적인 사과와 화합을 다짐하는 술자리로 봉합됐지만 왠지 우울해진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 이것을 인정해야만 해외촬영에서의 고통과 실망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8월9일 촬영현장 공개
어젯밤에 한국에서 날아온 차승재 (싸이더스픽쳐스) 대표와 식당에서 숙소까지 차를 타고 가던중, 매일같이 20키로가 넘는 밤길을 홀로 걷고 있는 (유)지태의 야간 트랙킹에 잠시 동행했다. 아무리 체중조절과 체력유지 때문이라고는 해도 이건 고행일 수밖에 없다.
(송)강호 형은 같은 시간, 그 좋아하는 소주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며 숙소앞 운동장을 50바퀴식 돌고 있다. 형은 이곳에 와보니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나 행복했다는 걸 절감한단다. 그건 두딸을 그리워하며 간식으로 나오는 사탕을 모으고 있는 (윤)제문 형이나, 자신의 촬영 전날엔 한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는 (박)희순 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8월24일 비행기 안에서
대원들의 행군장면을 헬기로 촬영할 때 보았던 '무지개'.. 봉준호 형이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 무지개를 보았다며 미신적인 기대를 가졌던 것이 생각나다. 나 역시 그 무지개를 행운의 무지개로 맘속에 새긴다. 그 행운이 앞으로의 촬영을 순조롭게 만들어주길 바라며. 뉴질랜드여, 안녕.
9월20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뉴질랜드 로케이션에서 우리 모두를 그렇게 괴롭히던 눈이, 이제는 세트에서까지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 이 영화에 대해 '무사'와 '유령'을 합쳐놓은 정도의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한국스태프는 위대하다. 나의 변덕과 집착을 언제나 묵묵히 소화해주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고의 퀄리티를 만들어내는 그들이 너무나 든든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몇몇 감독들과 제작자, 배우들의 공으로 얘기하지만 스태프의 뛰어난 역량이 없었다면 모든 건 공중누각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10월2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피로도 풀리지 않는 나날의 연속이다. (그러나) 엊그제 찍은 도형(송강호)과 민재(유지태)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보고 있자면 모든 걱정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힘들 때일수록 더욱 까다롭게!" (봉)준호 형이 보낸 문자가 힘이 된다.
11월 어느날 서초동 모 내과병원
"..당뇨네요.." 의사선생님은 무덤덤한 어투로 진찰결과를 설명한다. 30대 중반이 채 안된 나이에 벌써부터 이러고 있다니. 한심하다. 하지만 나보다는 영화가 더 걱정이다. 예상했던 촬영기간이 벌서 오버된 탓에 다음 작품이 걸려있는 일부 스태프에게 비상이 걸렸다. 회사에서도 슬슬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촬영전에 차(승재) 대표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순간이 닥칠 거야. 그때, 잘 이겨내야 된데이~" 지금이 바로 그 최악의 순간일까.
2005년 2월2일 서울 고수부지
"네가 서울이 남극으로 변할 때까지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는 말이 있어~" 김지운 감독이 걱정되는지 전화해서 한마디 하신다. '남극일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거나 조금 일찍 개시한 영화들 중 아직 찍고 있는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어쨌든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오케이입니다~!!" 와와.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영화가 정말 힘든 건 촬영을 끝냈다는 게, 전체공정의 겨우 반을 끝냈다는 점이라는. 아직도 나의 오디세이는 절반이나 남아있다..헐.
3월19일 라이브톤 ADR룸
끝까지 최선을 다해준 (송)강호형, (유)지태, 형들 모두 고맙기 그지 없다. 항상 힘들 때 한번씩 찾아와 우리를 기분좋게 만들어주었던 (강)혜정이도 고마운 존재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친구와 오래도록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CG와 음악, 믹싱이 남아있다.
4월10일 도쿄
한달 후면 '남극일기'가 완성되어진다는 것에,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정말 이제 도형과 민재..그들 모두를 저 새하얀 설원에 두고 떠나야 하는 걸까. 며칠 전 의사선생님이 나의 당수치가 내려 가고 있다며 앞으로 노력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단다. 지금까지 이 모든 전투를 참고 싸워온 나에게도 조금은 고맙다. 이제 나는 나의 도달불능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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