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지민이 2004년 '사마리아'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열아홉 곽지민 선생은 세상 무서운 걸 몰랐다. 김기덕 감독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단역인 줄 알고 오디션을 봤다. 나중에 대학 갈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본 오디션이다.
덜컥 주인공이 돼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현기증이 났다.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았던 연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던 열아홉 곽지민 선생은 과대평가가 된 것 같아 두려웠다.
열아홉 곽지민은 그래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문을 두드리고 강한 캐릭터를 맡았다. 누구는 '소녀X소녀'에서 담배를 꼬나문 모습이 곽지민 아니냐고 했다. 정작 곽지민은 다양한 색깔이 입혀지길 원했다.
스물여덟 곽지민 선생이 '청춘 그루브'를 들고 스크린에 돌아왔다. 말 그대로 돌아왔다. 곽지민은 '청춘 그루브'에서 메이저 데뷔를 앞둔 힙합가수에게 한 때 사랑했던 증거로 동영상이 있다고 협박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첫 사랑 같고 4차원 같고 백치미까지 물씬 풍기는 여인. 2년 전 이 영화를 찍었던 스물여섯 곽지민 선생이 온전히 담겨있다. 참고로 선생은 곽지민이 스스로에게 붙이는 애칭이다.
-'청춘 그루브'는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성장영화인데. 저예산으로 찍었고 개봉하기까지 2년여가 걸렸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변성현 감독님이 이런 작품을 준비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렵게 시나리오를 구해 읽었다. 캐릭터가 너무 좋아서 감독님에게 연락을 해서 오디션을 봤다.
-'사마리아' 이후 온전히 영화에 출연한 게 8년 여 만인데.
▶열아홉 고3일 때 곽지민 선생은 김기덕 감독이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도 몰랐다. 공개 오디션이 있다 길래 단역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봤다. 대학교 입학할 때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있었고. 연기 한 두 달 배웠을 때 덜컥 주인공이 됐다. 어린 나이에다 범상치 않은 캐릭터인데다 너무 부담이 됐었다. 과대평가된 부분도 많았고.
-'사마리아'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행보는 그렇지 못했는데.
▶열아홉 곽지민 선생은 무지하고 건방졌다.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이지 이미지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기 외에 부수적인 것들은 안하겠다고 생각했다. CF나 인터뷰, 예능 프로그램을 도대체 왜 해야 하나라며 거부했던 시절이었다.
-'소녀X소녀'로 다시 주목 받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독립영화에서 모습을 보이던데.
▶'소녀X소녀' 때 모습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대중적인 작품에 밝고 시원시원한 모습을 예뻐해 주시는 것 같다. 그런데 난 사랑하기 힘든 캐릭터에 더 애정이 갔다. 독립영화도 내 선택이었다. 그렇게 했기에 스물여덟 곽지민 선생이 있을 수 있었다.
-'청춘 그루브'는 왜 했나.
▶시나리오도 좋았고 캐릭터도 좋았고 무엇보다 여배우가 나 혼자인 게 좋았다. 여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을 해보니 혼자 하는 걸 해보고 싶었다.
-씬 수에 비해 컷 수가 굉장히 많던데. 한정된 공간에서 그렇게 찍었다는 건 리액션 샷을 TV드라마처럼 찍었단 뜻이기도 한데.
▶맞다. 과거 분량과 현재 분량도 순서대로 안 찍었고. 과거 장면에선 가발까지 써야 했는데 그 탓에 원형 탈모도 생겼다. 현장에서 봉태규와 이영훈, 그리고 나까지 굉장히 팽팽했다. 그러면서 리액션도 자연스럽게 흡수했던 것 같다.

-이영훈과 봉태규와 각각 베드신을 찍었는데. 첫 베드신이었는데.
▶(봉)태규 베드신은 제일 쉬웠다. 한 번에 끝났고. 워낙 베테랑이니깐. 오히려 이영훈이 너무 긴장해서 내가 배려하면서 찍은 기억이 난다. 베드신이 두렵다기보다 감독님이 갖고 있는 확고한 이미지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감독님은 남자 관객들이 저 여자가 내 여자이길 바라도록 연기하길 원하셨다.
-작품 속에선 핫팬티에 섹시한 모습인데 지금은 또 다른데.
▶작품을 할 때와 안할 때 몸무게 차이가 있다. 이렇게 갑자기 개봉할 줄 몰랐다.
-자신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고 백치미가 있으면서도 엉뚱하고 또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청춘 그루브'를 찍었을 때가 24살에서 25살로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때 첫 사랑, 첫 연애를 막 시작할 때였다. 영화 속에선 이별의 아픔을 표현해야 하는데 현실 속의 나는 너무 핑크빛이었다. 그런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물 다섯 곽지민 선생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강한 캐릭터를 해왔지만 실제 모습은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다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소녀X소녀' 때는 정말로 일진이 아니냐라고도 했다. 누구는 4차원이라고도 하고. 실제 내 모습은 '사마리아'와 가장 닮았다. 그 땐 연기를 한 게 아니었으니깐.
-데뷔를 강렬하게 했지만 그동안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는데. 이제 오버그라운드에 대한 욕심이 나진 않나.
▶애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포기할 것도 없다. 뭔가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긴 하다. 시나리오와 동화를 쓰곤 하는데 항상 어디론가 떠나는 이야기를 쓰게 되더라.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지 아니면 내 스스로가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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