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레슬러

스무 살 차이 나는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고백받은 아빠의 이야기인가. 모든 걸 바쳐서 키운 아들에게서 독립하는 아빠의 이야기인가. '레슬러'는 두 가지 이야기를 품었다가 길을 잃었다.
과거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였던 귀보(유해진). 죽자고 쫓아다녀 결혼했던 10살 연상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성웅(김민재)을 잘 키워내는 게 아내와의 약속이다. 레슬링 국가대표 아들의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자기는 찬밥 먹고, 아들은 더운밥 준다. 레슬링 체육관 운영해서 번 돈 아껴서 살림하고 아들 가르치고 그렇게 아들 아들 아들 하며 산다.
윗집 사는 성수 내외(성동일 진경). 귀보와 성웅을 가족같이 아낀다. 성웅과 성수의 딸 가영(이성경)은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다. 이제 스무살이 된 성웅. 가영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마침 가영도 성웅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가영이 먼저 건넨 말. "내가 네 엄마가 돼줄게." 충격을 받은 성웅에게 가영은 "귀보에 대한 마음이 계속 커져서 참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성웅은 가영의 고백에, 아빠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는 아빠가 지겹다. 아빠의 꿈을 대신 하는 것 같아 싫다. 너 위해 산다며, 너 하나만 보고 산다는 아빠가 싫다.
그런 성웅의 마음을 모르는 귀보. 점점 반항하는 아들을 보며 "자식 키우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런 귀보에게 엄마(나문희)는 "너도 니 자식만 그만 보고 너부터 챙기라"고 한다. 말 안 듣기는 똑같다며. "너는 20년 키웠지, 난 그런 자식 40년 키웠다"고 한다.
가영은 성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보에게 고백할 기회를 엿본다. 레슬링을 배우겠다며 체육관을 다닌다. 그런 가영을 귀엽게만 보는 귀보와 그런 가영이 못마땅한 성웅. 마침내 가영은 귀보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아들과 아빠, 아들과 여자 친구, 아빠와 아들의 여자 친구 이야기가 시작된다.
'레슬러' 가제는 '러브슬링'이었다. 레슬링을 매개로 사랑이 이어지는 이야기란 뜻이다. 남녀의 사랑일 수도 있고, 아빠와 아들의 사랑일 수도 있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영의 고백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아빠와 아들 이야기로만 남았다. 가영은 안전하고 뻔하고 갑자기 이야기 속에서 퇴장한다. 아빠와 아들의 갈등, 그리고 화해를 위해서만 기능하고 사라진다. 그리하여 '레슬러'는 분명 아들의 여자 친구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지만 아들과 아빠만 남는다. 안전한 선택일 수 있지만 안일한 선택이다. 그 탓에 가영이란 여성 캐릭터는 '레슬러'에 잘 지내던 아빠와 아들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는 도구로서만 활용된다. 왜 친구 아빠를 사랑하게 됐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지, 이유조차 사라진다.
주제와도 안 맞는다. 아들에게서 독립하라는 이야기, 아빠에게서 독립하라는 이야기, 결국 자기 자신의 꿈과 행복을 찾으라는 이야기에서, 가영의 꿈과 행복만 사라진다. 두 남자를 위해 희생할 뿐이다.
스무 살 차이 나는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친구의 아빠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레슬러'의 문제는, 가영을 비롯해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남자들을 위해 기능하는 도구로만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귀보의 엄마도, 귀보의 친구이자 성수의 아내인 미라도, 귀보의 맞선 상대인 똘끼 충만한 의사도, 도구일 뿐이다. 게이인 귀보의 후배도 마찬가지. 개인의 행복을 찾는 걸 응원하면서, 정작 영화의 가장 큰 갈등 요소인 가영의 행복은 아빠와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된다. 안전한 선택을 하려다 안일한 선택을 해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맺고 만다. 유해진의 원맨쇼로 '레슬러'의 안일한 선택을 구원하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아들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많다. 아들의 여자가 아빠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많다. '레슬러'는 익숙한 이야기를 재밌고 따뜻하고 안전하게 풀려다 길을 잃었다. 아빠와 아들, 엄마와 아들, 각자의 행복, 그리고 꿈을 이야기하는데 왜 여자의 행복은 사라져야 하는지, 빠떼루를 줘야 마땅하다.
5월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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