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팝 기획자이자 극작가겸 소설가인 나상천 작가(꿈의 엔진 대표)가 2023년과 2024년 두 차례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을 펴냈다. 이 소설에는 길 위에서 마주한 인연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곳곳에 녹아있다.
나 작가의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네 인물의 여정을 그린 작품. 아내를 잃고 요리사로 새 삶을 시작한 중년 셰프 킴스, 오디션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싱어송라이터 지망생 도로시, 불가능에 가까운 구독자 33만 명 미션을 수행 중인 유튜버 로저, 무거운 비밀을 안고 길 위로 숨어든 스물한 살 청년 준상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이들이 33일간 같은 길을 걸으며 각자 도망쳐온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와 변화를 맞이하는 과정을 담았다.
"스페인의 흙길에서 흘린 누군가의 땀방울이 노래가 되고 영화가 되고 책이 되고 무대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시대. 카메라 앞에 가장 환히 서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음원 차트 뒤에서 가장 치열하게 결과를 증명해 오던 사람들이,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을 가장 절실히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가장 정직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 내 속도로 걸으면 결국 닿는다."
나상천 작가는 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내 속도로 걸으면 결국 닿는다'는 희망을 전한다.
연예계는 지금, 왜 800km 흙길로 향하는가.
스포트라이트가 환할수록 그림자도 짙다. 평가받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잠시 사라질 수 있는 권리'는 어쩌면 가장 사치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한국 연예인들의 발길이 유독 한 곳으로 모이고 있다. 스페인 북부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누구는 병을 안고, 누구는 친구를 떠나보낸 슬픔을 안고, 누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 이 길에 섰다. 그들이 길 위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다시 들고 돌아왔는지를 따라가 보았다.
1. 악뮤(AKMU) 이수현·이찬혁 — "내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수현은 일에 대한 슬럼프가 삶 전체로 번져 은퇴까지 고민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어느 정도 상태인지 모를 만큼 심각해지고 있었다"고 그녀는 훗날 회상했다. 그 위기를 직감한 오빠 이찬혁은 직접 합숙을 제안하며 이른바 '정신개조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고 운동을 시키며 동생을 살뜰히 챙긴 것이다. "곡을 만들듯 수현이를 잘 피어나게 하고 싶었다"는 게 오빠의 표현이었다. 이수현 역시 "오빠는 저에게 구원자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산티아고에서 이수현은 "발이 부서질 것 같은데, 그 이유가 결국 나 때문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족저근막염을 얻고 돌아왔다. 그러나 더 큰 건 내면의 깨달음이었다. "내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구나." 늘 1등으로 도착하던 오빠와 매번 꼴등으로 도착하던 자신이 결국 같은 성당에 도달한다는 사실 — "속도가 다르고 도착 시간이 달라도 우리는 같은 길을 함께 해낸 사람이 됐다." 7년 만의 정규 4집 《개화(FLOWERING)》는 그렇게 길 위에서 길어 올린 회복의 보고서가 됐다. 타이틀곡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과 선공개곡 '소문의 낙원'이 힐링과 치유의 키워드로 사랑받으며 음원 차트 상위권을 나란히 점령 중이다.
2025년 9월, 결혼 11개월 만에 이혼을 발표한 직후, 김보라는 절친 이수현의 "언니도 갈래?"라는 한마디에 즉흥적으로 짐을 쌌다. 계획도, 준비도 없는 출발이었다.
포르투갈 길 일부를 완주하던 중 그녀는 길 위에서 생일을 맞았다. "10년 전 우리는 오늘날을 알았을까. 함께 걸어서 웃음도 157배, 걸음도 더 힘차진다." 그녀는 SNS에 그렇게 적었다. 누구는 혼자여서 길에 가고, 누구는 친구가 있어서 길을 걷는다. 김보라에게 그 길은 인생의 가장 무거웠던 한 챕터를 닫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가장 자연스러운 손동작이었다.
3. 김유정 — "이 자연의 일부로 속해 있다는 행복"
어렸을 적부터 "산티아고에 가서 걷겠다"가 꿈이었던 그녀는, 코로나로 잊고 지내다 갑자기 쉴 타이밍이 생겼을 때 즉흥적으로 결심했다. 출발은 단 2주 뒤. 배낭과 운동화를 사서 서울 곳곳을 걸으며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단련한 채 떠났다.
33일을 홀로 걸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걷기만 했는데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일어나면 '걷자', 배고프면 '먹자', 할당량을 채우면 '자자'를 33일간 반복하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단순함이 그대로 작동하더라는 것이다. "그냥 하자, 즐기자, 해보자." 두려움 없이 행할 용기, 자연의 일부로 속해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가치관의 정립까지 — 그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저에게 훨씬 더 큰 세상을 알려준 길"이었다고 회상했다.
4. 정일우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27세에 뇌동맥류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인한 뇌진탕·뇌출혈의 영향"일 수 있다고 했다. 시한폭탄을 머릿속에 안고 살게 된 그는 한 달 넘게 집 밖에 나가지 못할 만큼 깊은 우울에 잠겼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현재를 즐기자." 그렇게 평소 가보고 싶었던 산티아고에 올랐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세 번 걸었다. 마지막 날, 산티아고 대성당의 순례자 미사 도중 이유 모를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치료가 가능한 상태'라고 했을 때 이미 구원받은 느낌이었다"던 그는, 순례 후 "현실을 즐기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인드를 얻었다. 그 감사함의 유효기간은 6개월에서 1년. 그래서 그는 또 떠난다.
5. 정경호 — 아버지와 단둘이 걸은 길
정경호의 아버지는 40여 년간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을 만든 정을영 PD다. 드라마 감독이라는 직업은 집을 길게 비울 수밖에 없는 외로운 일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이해가 안 됐다"던 정경호가, 본인도 20년 가까이 연기를 한 뒤에야 아버지의 시간을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부자(父子)는 단둘이 산티아고 순례자 길에 올랐다.
길 위 어느 지점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기 서 보라"고 했다. 그리고 위쪽에 올라서서 말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아빠라고 생각하고, 아빠를 향해 뛰어와 보라." 정경호는 당황하면서도 달려가 아버지를 안았다. 평생 일에 매여 채우지 못한 시간이, 그 흙길에서 비로소 다시 채워졌다. 화려한 토크쇼 대신 묵묵히 같은 보폭으로 걷는 것 — 그 단순한 행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가장 길었던 침묵을 풀어냈다.
6.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 — 친구의 쾌유를 빌며 걸은 800km
30년 음악 동지 故 전태관이 신장암 투병 중이던 2015년 3월, 김종진은 홀로 스페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달 남짓, 800km. 그것은 친구의 쾌유를 비는 가장 절박한 형태의 기도였다.
2018년 12월, 전태관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김종진은 30주년 소극장 공연 30회를 홀로 마무리한 뒤 한동안 음악과 거리를 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故 전태관과 함께해 준 팬들을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산티아고 800km가 그에게 준 것은 어쩌면 친구의 회복이 아니라, 친구를 떠나보낸 뒤에도 음악을 이어갈 수 있는 견딤의 근육이었을 것이다.
7. 인순이 — 47년 가수 인생을 점검하며
2023년, 그녀는 800km 순례길을 완주했다. 이유는 단 하나. "쉼 없이 달려온 가수 인생을 잘 보냈는지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흑인 혼혈로 태어나 차별과 편견 속에서 무대 위에 서야 했던 67년의 시간, 그 무게를 한 번쯤 흙길에 풀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순례를 마친 그녀는 67세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어린 시절 가족 부양을 위해 포기했던 학력을 마침내 자기 손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그리고 박미경·신효범·이은미와 함께 박진영 프로듀스의 '골든걸스'로 새 도전을 감행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위로받고 싶을 때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800km 흙길은 "위로하는 사람도 위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가르쳐 준 길이었다.
8. 손미나 — 팬데믹의 끝, 자신을 다시 만나러
방송인 손미나는 2022년 봄, 코로나 팬데믹의 끝에 산티아고로 향했고, 그 여정을 직접 제작·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엘 카미노》(2023)로 공개했다. 80세 생일을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맞이하려는 영국 노인,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길에 오른 벨기에 청년 등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필름은 "그 길을 걷기 전과 후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그녀의 고백으로 끝난다.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이 시민공로십자훈장을 수여한 이유 역시 이 다큐멘터리가 갖는 양국 간 가교 역할 때문이었다.
9. 나상천 — "도망쳤더니, 비로소 내가 보였다"
걸스데이, 모모랜드, 경서 등 정상급 K팝 아티스트들의 기획·마케팅을 총괄해 온 나상천은, 무한 경쟁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끊임없이 결과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매출 그래프, 음원 차트, 음반 판매량 —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숫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모든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2023년과 2024년, 두 해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도망'이었다. 기꺼이 선택한 도망.
첫해의 순례가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순례는 무엇으로 다시 채워야 할지를 묻는 시간이었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답은 '창작'이었다. K팝 기획자에서 소설가·뮤지컬 프로듀서로의 거대한 좌표 이동이 거기서 시작됐다. 그 깨달음의 결정체가 바로 2026년 4월 밀리의서재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어느 멋진 도망》이다. 킴스, 도로시, 로저, 준상 — 각자의 짐을 짊어진 네 명의 인물이 까미노 위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 소설은 출간 하루만에 2쇄 발행을 결정하는 화제작이 되었다.
그가 두 번의 순례에서 길어 올린 이 서사는 이듬해 대형 뮤지컬 '까미난떼'(Caminante)》로 재탄생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왜 그들은 모두 같은 길로 향하는가?
이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공통된 결론이 하나 있다. 무한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결과를 증명해야 하는 직업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페이스로 걸으면 반드시 목적지에 닿는다는 이 길의 단순한 진리를 한 달 가량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스페인의 흙길에서 흘린 누군가의 땀방울이 노래가 되고 영화가 되고 책이 되고 무대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시대. 카메라 앞에 가장 환히 서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음원 차트 뒤에서 가장 치열하게 결과를 증명해 오던 사람들이,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을 가장 절실히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가장 정직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 내 속도로 걸으면 결국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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