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디오 판독 시대가 낳은 풍경. 바로 '사라진 선수단 전원 철수'다.
글쓴이가 어릴 적 프로야구를 볼 때면 가끔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대개 판정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억된다. 상황이 벌어지고 감독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온다. 그러자 심판도 기죽지 않고 맞선다. 얼마 후 감독은 크게 팔을 휘저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간다. 감독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선수들은 경기장을 비우고 더그아웃으로 얌전히 들어온다.
씩씩 거리며 벤치에 앉아 있는 감독. 그를 찾아온 심판진은 몰수패를 선언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정말 몰수패가 선언되는 걸까? 조마조마한 순간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대부분 몰수패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선수들을 향해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라는 감독의 지시가 떨어진다. 이내 관중의 함성과 함께 경기가 속행된다.
'선수단 전원 철수'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최근에는 이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근래에는 두 노장 감독, 김성근 전 감독과 김응룡 전 감독이 선수단을 전원 철수시킨 적이 있다.
가장 가깝게는 2015년 6월 12일 대전 LG-한화전에서 나왔다. 한화의 3회말 2사 1,2루 기회. 당시 한화에서 뛰던 김태완(현 넥센)이 낮은 공에 삼진을 당했다. 포구한 포수(조윤준)의 미트가 땅에 닿았고, 이를 본 김성근 감독이 나와 볼이 아니냐고 문승훈 구심에게 항의를 하며 따졌다. 이 과정에서 김 감독이 이닝 교대 때 선수단을 철수시킨 바 있다.
2014년 5월 21일 목동 한화-넥센전에서는 김응룡 감독이 선수단을 전원 철수시킨 적이 있다. 6회말 2사 2루. 당시 넥센 윤석민(현 kt)의 3루 베이스 위를 지나가는 타구에 대해 김응룡 감독이 파울이라고 항의했고, 불복의 의미에서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이후 김 감독이 퇴장을 당했고, 선수들을 다시 내보내라는 뜻을 전하면서 경기는 속개됐다. 퇴장을 당한 김응룡 감독은 나중에 제재금 10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오심을 줄이기 위해 KBO리그에 비디오 판독이 도입된 지도 만 3년이 지났다. 지난 2014년 올스타 휴식기 이후 '심판 합의판정'이라는 이름의 비디오 판독 제도가 도입됐다. 지난해까지 현장에서 심판들이 중계화면을 보고 판정을 내렸다면, 이제는 비디오 판독센터에서 최종 판독이 이뤄진다.
비디오 판독 제도가 도입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 같으면 오심에 '악'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감독 그리고 선수들도 '네모'를 그릴 수 있게 됐다. 자칫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비디오 판독과 관련해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오독이 나온다거나 혹은 비디오 판독에 대한 상황 적용이 자의적으로 이뤄지면서 논란이 계속 일고 있다. 지난달 20일에는 손아섭이 오독으로 홈런 하나를 잃어버렸고, 결국 김호인 비디오 판독센터장이 10경기 출장 정지 제재를 받았다. 또 앞서 9일 광주 넥센-KIA전에서는 배트 투 터치에 대해 비디오 판독이 이뤄지면서 '포괄적 적용'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과거에는 이런 과정에서 감독들이 '선수단 전원 철수'라는 초강수를 꺼내들기도 했다. 하지만 비디오 판독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에는 이런 장면을 보기가 어렵다. 감독과 선수들이 비디오 판독의 결과를 믿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선수단을 전원 철수시킨다면 몰수패를 당할 수도 있다. 몰수 경기란 규칙 위반으로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고 잘못이 없는 팀에 9-0 승리를 부여하는 경기다(야구규칙 2.31).
KBO에 따르면 몰수 경기는 KBO리그 36년 역사상 단 두 번 나왔다. 가장 먼저 1982년 8월 26일 대구 시민구장서 열린 MBC-삼성전. MBC가 2-5로 지고 있는 4회말 삼성 공격. 병살타를 면하기 위해 1루 주자 배대웅이 MBC 2루수 김인식과 충돌했다. 이에 김인식이 배대웅의 얼굴을 때리며 싸움이 일어났다. 당시 김동앙 주심이 두 선수의 흥분을 가라앉힌 뒤 폭행을 가한 김인식에게 퇴장을 명했다. 이에 MBC 선수들이 불복, 경기에 응하지 않았고 25분 뒤 몰수 경기가 선언됐다.
당시 KBO는 MBC 구단에 제재금 200만원, 당일 입장료 및 TV 중계료 전액을 배상토록 했다. 또 MBC 백인천 감독에게 제재금 100만원 및 5경기 출장 정지, 김인식에게 제재금 10만원, 김동앙 주심에게 제재금 20만원 및 5경기 출장 정지, 박명훈 2루심에게 제재금 10만원 및 5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각각 내렸다. 경기 결과는 삼성의 9-0 승.
두 번째 몰수 경기는 1985년 7월 16일 잠실 OB-MBC전에서 나왔다. 5-5로 맞선 6회말 MBC의 1사 1,3루 기회. 1루주자 박흥식이 2루 도루를 시도하다가 협살에 걸렸다. 이 틈을 타 3루주자 유고웅이 홈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OB 김성근 감독이 나와 박흥식이 스리피트 라인을 벗어났으므로 아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김양경 2루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김 감독은 선수 전원을 더그아웃으로 철수시켰다. 이근우 주심은 5분의 여유을 준 뒤 경기 속행을 지시했다. 하지만 OB가 이에 불응했고, 이에 이 주심은 김 감독을 퇴장시켰다. 이어 5분 안에 감독 대행을 지정하고 경기 속행을 요구했으나 OB가 불응, 역대 두 번째 몰수 경기로 기록됐다. 결과는 MBC 6-5승. 이후 32년 동안 KBO리그에 몰수 경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비디오 판독 제도가 도입되면서, 앞으로 몰수 경기는 물론 선수단 전원 철수 풍경도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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