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경기가 최고였다."
세계선수권대회 4강을 비롯해 수많은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캄보디아 당구 영웅' 스롱 피아비(33·블루원리조트 엔젤스)에게 이번 대회 우승이 갖는 의미는 유독 특별했다.
스롱은 11일 경기도 고양시 JTBC 스튜디오 일산에서 열린 SK렌터카 LPBA 월드챔피언십 2023 결승전에서 김가영(40·하나카드 원큐페이)과 3시간에 달하는 풀세트 접전 끝 세트스코어 4-3(11-6, 8-11, 11-5, 11-3, 9-11, 8-11, 11-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상금 7000만 원을 더한 스롱은 역대 누적 상금을 1억 9880만 원으로 늘렸다. 2억 2085만 원으로 1위에 올라 있는 김가영을 바짝 쫓았다. 누적 포인트랭킹에서도 5만 점을 추가하며 누적 20만 3100점으로 김가영(24만 5950점)에 한 발 더 다가섰다. 다승 부분에선 5승으로 김가영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왕중왕전 격인 월드챔피언십에서 스롱은 지난 시즌 김가영에 당했던 패배를 완벽히 설욕했다. 역대 상대전적에서 5승 1패로 압도적 우위를 보인 스롱이지만 지난해 당한 1패는 너무도 뼈아팠다. 1년 전 결승에서 김가영을 만난 스롱은 1-1에서 맥없이 내리 3세트를 내주며 고개를 숙였다. 특히 4,5세트엔 단 2득점에 그치며 스롱답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다. 스스로도 당시 극심한 컨디션 난조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롱은 그 사이 더 성장했다. 1차 대회에서 한 번, 마지막 8차 대회에서 또 한 번 정상에 올랐다. 준우승도 한 차례 거뒀다.
개인투어 8차전 우승 후 팀리그에서 맹활약하며 블루원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겹경사를 맞은 스롱에겐 마지막 넘어서야 할 산이 있었다. 지난해 우승 문턱에서 고개를 숙였던 월드챔피언십에서 그것도 자신에게 아픔을 줬던 김가영과 마주했다.

스롱의 기세가 매서웠다. 세트스코어 1-1에서 스롱은 3,4세트를 내리 가져왔다. 한 번 분위기를 타면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줬다. 3세트엔 2-4로 밀리던 7이닝째에 6득점 하이런, 4세트엔 2이닝까지 4점, 3이닝에 하이런 6점을 내며 손쉽게 3-1로 앞서갔다.
그러나 김가영은 역시 까다로운 상대였다. 5세트 초구를 성공시킨 그는 하이런 5득점에 이어 2이닝에도 3점을 몰아치며 빠르게 앞서가며 한 세트를 따라붙었고 6세트엔 8-8 동점 상황에서 걸어치기 뱅크샷과 앞돌리기 득점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운명의 7세트 끝까지 쉽사리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0-3에서 5득점하며 역전했으나 이번엔 김가영이 동점에 이어 기세를 타고 챔피언 포인트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게 뼈아팠다. 스롱은 뱅크샷으로 9-10으로 추격했고 빗겨치기와 뒤돌리기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생애 첫 월드챔피언십에 등극했다.
개인 정규 투어 우승과 팀리그에 이어 월드챔피언십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스롱은 LPBA에선 최초로, PBA를 통틀어도 프레드릭 쿠드롱(웰컴저축은행·벨기에), 다비드 사파타(블루원리조트·스페인)에 이어 3번째로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됐다. 김가영과 상대 전적도 6승 1패로 더 차이를 벌렸다.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 나선 스롱은 "정말 못 믿겠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우승 한 건가' 싶다. 시상식 때도 얼떨떨했고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멍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동안 긴장감 넘치는 대회 우승을 앞두고는 잠을 쉽게 청하지 못하는 등 컨디션 난조를 보였던 스롱이다. 이번 대회 전까지 거의 두 시즌 만에 4차례나 정상에 오르는 무서운 기세를 보여줬지만 평소와 다른 경기력으로 준우승에도 세 차례나 머물렀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운동을 통해 숙면을 취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특별한 컨디션의 문제는 없었다. 다만 정규 투어 4번을 차지해야 얻을 수 있는 큰 상금이 걸린 대회인 만큼 따라붙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앞서가다가 흐름을 내줬고 결국 풀세트까지 치르게 됐다. 스롱은 "내 공에만 집중하자고 계속 되뇌었다"면서도 "테이블이 조금 뻑뻑했고 갑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고 급한 마음이 들었다. '편하게 경기하자'하다가도 김가영 선수가 쫓아오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컨디션도 안 좋아지는 것 같고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결국 극복해 냈다. 7세트를 상황을 돌아본 그는 "너무 조마조마했다. '큰일났다, 어떡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득점 되겠다 싶다가도 빠지고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 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엄청 힘들었다"면서도 "마지막 세트에서 조차 10-10 상황에서 한 점을 남긴 순간에 우승하는 순간을 그려왔다. 언제 PBA에서 이런 명경기가 나올까 싶었는데 내가 그 경기를 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전했다.
과거부터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스롱이지만 "오늘 경기가 최고였다. 사실 연맹(KBF) 시합은 감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프로 무대에서 첫 우승했을 때 그렇게 감정이 끌어 올랐던 적이 없었다"며 "(PBA에서 거둔) 매 우승마다 그랬다. 그림도 프로답게 만들어준다. 흡사 월드컵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됐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고 PBA에 대한 고마움도 표했다.
늘 주변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고 배려해주는 가족이 있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를 당구로 입문시켜준 남편 김만식 씨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다. 잔소리가 많다며 투덜대기도 하는 스롱이지만 남편의 배려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김 씨는 이날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스롱은 "내가 불편할까봐"라며 "경기장에서 마음 편하게 치라고 오지 않겠단다(웃음). 집에서 TV로 경기를 보는데도 엄청 긴장한다. 실제로 보면 더 긴장할 것 같다고 못보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캄보디아에 있는 부모님도 빼놓을 수 없는 지원군이다. 1차 대회 때는 부모님이 한국을 찾아 더 마음 놓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매일 같이 연락하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더해준다. 스롱은 "매일 옷 스타일도 정해주신다. 꽃무늬 피해라, 검정색 입어라, 빨강색 입어라, 이렇게 말씀하신다"며 "맨날 왜 그렇게 힘들게 이기냐고,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제가 '재미없잖아'라고 답하곤 한다"고 전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떨어졌던 컨디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 김가영이라는 벽. 스롱은 이번 시즌을 더할 나위 없는 결과물과 함께 마무리했다. 다음 시즌 행보에 벌써부터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