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하고 싶은 거 다 (사인) 내줄테니까 자신 있게 붙어, 믿고 던져."
전체 1순위 신인 투수는 고비를 넘어섰다.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주는 든든한 안방마님의 존재가 컸다. 이제 고작 22세인 키움 히어로즈 주전 포수 김건희의 이야기다.
2023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1라운드 6순위로 키움 유니폼을 입은 김건희는 첫 시즌 대부분을 퓨처스에서 보냈고 지난해 66경기 431⅔이닝을 소화하며 김재현(758⅓이닝)에 이어 2번째 포수였다.
올 시즌엔 87경기, 598이닝 동안 포수 마스크를 끼며 팀 주전 안방마님으로 거듭났다. 시즌 타율 0.229(266타수 61안타) 2홈런 19타점 19득점, OPS(출루율+장타율) 0.573로 초라한 성적표지만 22세 주전 포수를 단순히 타격 수치만으로 평가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다.
포수는 진가를 나타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게 정설이다. 반면 김건희는 아직 3년 차, 22세에 불과한 포수다. 단순히 나타나는 수치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올 시즌 전체 1순위 신인 정현우를 비롯해 김연주, 박윤성, 김동규(이상 21), 김윤하, 손힘찬(이상 20), 윤현, 박정훈, 김서준, 임진묵, 정세영(이상 19) 자신보다 수많은 투수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중 신인만 6명에 달했다. 그만큼 이들을 리드해야 했던 김건희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장세를 나타내는 영건 투수들이 있다. 부침을 겪던 정현우도 개인 6연패를 끊어내고 139일 만에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
지난달 29일 LG 트윈스전에서 5회까지 1실점 피칭을 이어간 정현우는 6회 돌연 안타에 이어 볼넷을 남발했다. 무사 만루가 되자 김건희가 이승호 코치와 함께 마운드에 올랐다. 김건희가 정현우에게 큰 소리로 나무라는 장면도 포착됐다. 정현우는 이후 연속 삼진을 잡아냈고 밀어내기 볼넷으로 1점을 더 내줬지만 후속 타자를 뜬공으로 잡아내며 승리 요건을 챙겼고 결국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경기 후 정현우는 "(김)건희 형이 올라오면 항상 자기는 하고 싶은 걸(사인을) 다 내줄 테니까 자신 있게 붙으라고 강하게 말한다"며 "코치님도 올라오셔서 네가 시작한 거 끝까지 한 번 책임져보라고 하셨고 건희 형도 그냥 믿고 던지라고 해서 후회 없이 던지려고 던졌다"고 말했다.
김건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스타뉴스와 만난 김건희는 "'정신 차리고 던져 임마'라고 강하게 말했다. 아직은 어린 선수이기에 더 잘 이끌어주려고 한다. 내가 악역을 맡아야 경기 후엔 고맙다는 말도 듣게 되더라. (정현우는) 애착이 가는 선수"라고 전했다.
김건희는 "경기 시작하자마자 (정)현우 공을 받아보고 '오늘 됐다' 싶었다. 똑같은 공이지만 자기가 던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운드에서 즐겁게 하니까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고 감동을 느꼈다"며 "현우가 좋은 경기도 많이 했는데 어렵게만 가다가 승리 투수 요건을 놓쳐 아쉬웠는데
시즌 막판 불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어린 투수들, 윤석원과 박윤성 등의 상승세도 김건희의 존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김건희는 팀과 투수들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역을 자처한다. "투수는 마운드에서 엄청 예민한 포지션이고 조금만 뒤틀리면 볼이 들어간다. 제가 조금 희생을 하고 나쁘게 해도 투수가 잘 던지면 보람이 있고 투수에게도 좋은 것"이라며 "모든 투수들에게도 얘기하는데 안타를 맞고 폭투를 해도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마운드에서 편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자기가 못 던졌다고 생각하면 금방 내려오게 된다. 투수를 해봤기에 너무 속상한 마음을 잘 안다. 차라리 제가 포수로 앉아 있을 때엔 나에게 탓을 하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포수를 흔히 안방마님이라고 한다. 김건희는 강한 메시지로 엄하게 꾸짖는 아빠의 역할도 하지만 한 없이 품어주는 엄마의 역할까지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 특히나 경험이 없는 어린 투수들에겐 더 그렇다.
아직 직접적으로 자신을 탓한 투수는 없었다면서도 "그래도 '왜 이 상황에서 이 사인을 내셨나'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저는 매 상황에 대해 다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미안하다고도 얘기를 한다"며 "그러면 투수들도 빨리 인정을 하고 다음에 또 자기가 던지고 싶은 걸 던져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저는 '네가 던지고 싶으면 나도 오케이'라고 해준다"고 말했다.

때론 심리 상담사 역할까지 한다. "박도영 코치님이 심리 쪽으로 자격증이 있다. 대화를 해보면 정말 잘 들어주시고 얘기를 해주시는데 그게 멋있더라"며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후배라고 해도 내 얘기가 다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너희 뜻이 그렇다면 하고 느껴봐야지 알지'라고 생각한다. 제재하고 뭐라고 하면 분열만 생기는 것 같다. 후배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만 얘기해주고 직접 느껴보게 해주려고 한다"고 전했다.
강한 어깨는 김건희의 가치를 가장 돋보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 중에서도 도루 저지율은 33.3%(22/66)로 100이닝을 주전급 포수들 중 김형준(NC·35.5%)에 이어 2위에 달했다.
김건희는 "도루 저지 능력을 주변에서 많이 언급해주시는데 제가 잘 던졌다기보다는 투수들이 킥도 빨리 해주면서 많이 잡은 것이다.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강한 어깨는) 아버지, 어머니가 어깨와 팔꿈치를 쓰는 정구를 하셨는데 잘 물려받은 것 같다. 물론 제가 노력한 것도 많다"고 덧붙였다.
아직은 스스로도 부족함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만족할 수 없다. "야구 실력으로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욕심도 많지만 그걸 계속 속에 품고 있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힘들더라. 그럼에도 선수로서 조금씩은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야구 선수로서, 사람으로서도 성장하고 있다고 코치님들도 말씀해주셔서 그런 점에선 만족한다. 야구 잘하는 선배들 보면 다 성격이 밝다. 그렇기에 당장은 실력은 둘째고 먼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포수라는 포지션에 걸맞게 김건희는 자신보다는 팀을 먼저 떠올린다. 지난해 우승 포수 김태군(KIA)은 "투수는 귀족, 외야수는 상인, 내야수는 노비, 포수는 거지"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포수라는 포지션이 가진 고충을 이야기한 것이다. 김건희도 "투수가 잘 던지면 그 이상 바라는 건 없다. 태군 선배님이 말씀하신 걸 들었는데 아직 야구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며 "타격에선 못 쳐도 포수로서 팀을 위해서라도 활기차게 해야 하고 그러려고 한다"고 전했다.
막중한 책임감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라운드에서나 외부에서나 팀에서 주장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책임감이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김건희는 "그것 말고는 없다. 포수는 홈플레이트에 앉아 있으면 주장이라 생각해야 한다. 야수들이 다 있어도 포수는 항상 주장처럼 얘기해야 하고 어려워도 선배처럼 지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선배로 커 나가야 한다. 다른 후배들도 나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