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예계가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걸핏하면 '최초'라는 말을 접두사처럼 남발하며 팬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수 비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를 홍보하는 워너브라더스코리아는 지난달 28일 "비가 한국배우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프리미어 레드카펫을 밟은 배우로 기록됐다"는 홍보자료를 배포했다.
같은달 26일(이하 현지시간) 비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노키아센터에서 열린 '스피드레이서' 월드 프리미어에 참석했다. 제작자 조엘 실버와 에밀 허시, 매튜 폭스, 크리스티나 리치, 수전 서랜든 등과 함께했다.
이런 행사를 우리나라에서는 '언론공개+VIP 시사회'라고 한다. 어지간한 영화는 대부분 치르는 이벤트다. 영화관 입구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밟고 들어가면서 언론의 카메라 세례에 응답한다. 국제 영화제의 '레드카펫' 이미지만 흉내냈을 뿐 권위도, 의미도 크지 않다.
국내 미디어는 이미 2002년 박중훈이 '토종' 한국인 최초로 할리우드 프리미어 레드카펫을 밟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해 10월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새뮤얼 골드 극장 앞에 '찰리의 진실'에 출연한 박중훈은 할리우드 배우들과 나란히 섰다.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아들 필립 안을 필두로 몇몇 한국계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적은 있다. 한국에서 스타덤에 올라 할리우드로 입성한 박중훈이나 비가 격려받아 마땅한 이유다. 문제는 박중훈이 할리우드를 다녀왔다는 뉴스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최초'를 들먹이는 무지와 무신경이다.
할리우드뿐 아니다. 가수 보아가 일본 음반판매 순위표인 오리콘 차트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를 차지했다는 불확실한 전언도 그대로 국내에 보도됐다. 중견가수 김연자 측의 항의가 즉각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일본진출 20년을 넘긴 김연자를 비롯해 계은숙, 조용필 등이 일본에서 바람을 일으킨 지 오래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와 기록은 무시되기 일쑤다. 최근들어 일본으로 진출한 아이들 스타들이 슬그머니 '선구자'로 포장되기에 이르렀다.
몰라서 혹은 일부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러한 행태가 한국 연예뉴스의 신빙성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