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 누구나 흉내냈지만 아무도 넘어서지 못한

[형석-성철의 에로&마초]

주성철 / 입력 : 2008.09.2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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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었던가 아니면 12월? 학창시절부터 홍콩영화에 빠져 살다, 세월이 흘러 홍콩여행을 떠나게 됐을 때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항에 내려 구룡 반도에 여장을 풀었을 때 당시 첫 느낌은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어라, 코트 입을 일이 없잖아. 왜 이리 따뜻해?”

그렇다. 그토록 내 청춘을 지배했던 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과 적룡이 입었던 롱 코트는 절대 입을 일 없는 날씨였다. 채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속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오우삼도 인정했던 사실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영웅본색'을 만들면서 주인공들에게 ‘멜빌의 남자들’처럼 롱 코트를 입게 했다. 결코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홍콩 기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설정이었지만, 오우삼은 주윤발에게 의상은 물론 연기 스타일까지 그 모든 것을 '사무라이'(1967)의 ‘마초’ 알랭 들롱처럼 해주길 바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무표정,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도덕성 등 남성적 신사도의 화신이 바로 '영웅본색'의 주윤발이었다.


구창모의 ‘희나리’를 번안한 광둥어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자신의 옛 기억을 추억하는 장면,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며 친구의 복수에 나서던 모습, 질주하던 모터보트를 다시 돌려 친구를 도우러 총을 난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당시 남성 팬들을 열광시킨 명장면이었다. 이른바 ‘홍콩 누아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영웅본색'에서 무사들의 검은 총으로 대체됐고, 폭력과 죽음의 순간을 슬로 모션으로 늘여낸 액션신은 더없이 화려해졌다. 로맨틱한 영웅주의,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의리와 우정, 유혈이 낭자한 총격신, 유려한 슬로 모션의 폭력미학은 '영웅본색'을 단숨에 현대 누아르 영화의 만신전에 올려놓았다.

'영웅본색'의 주윤발은 당시까지만 해도 웃통을 벗은 이소룡과 화려한 기예를 펼치던 성룡의 액션에 열광하던 한국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조지폐를 태워 담뱃불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던 그의 모습은 단숨에 ‘주윤발 신드롬’을 형성했다. 게다가 다른 남자배우들과 비교해 쌍권총을 든 ‘간지’ 자체가 남달랐다. 누구나 주윤발을 흉내 냈지만 아무도 주윤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집도 가족도 없는 ‘낭만적 마초’ 소마(주윤발)는 풍부한 열정, 감성, 우수 모두를 갖춘 고전적 신사이기도 했다. 결국 오우삼은 사라져 가는 의리와 도덕, 전통적 가치의 복원을 믿는 이상주의자였고 그것은 주윤발을 통해 형상화됐다. 주윤발이 '영웅본색' 이후 언제나 든든한 큰 형 같은 이미지로 어필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영향이 컸다. 당시 홍콩의 모든 영화사들은 시나리오가 채 나오기도 전에 일단 주윤발과 작품 계약부터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영웅본색'이 여전히 장기 상영 중인 가운데, 주윤발의 최신작인 '황시'가 개봉했다. 두 작품 사이의 세월은 무려 20년, 거의 주윤발의 처음과 끝을 함께 마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참 묘하다. 이제 주름도 늘고 표정도 지나치게 온화해져서 왕년의 남성적 면모를 찾아보긴 힘들지만 그래도 그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청춘들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덧붙여 기쁜 소식 한 가지. 그가 현재 맹촬영 중인 영화가 바로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현재 홍콩 누아르 영화의 마지막 거장으로 칭송받는 두기봉의 신작이기에 그 기대는 크다. 낭만 마초 주윤발은 꼭 다시 멋지게 돌아올 것이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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